아동기에 겪은 극심한 스트레스는 이후 건강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스트레스가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을까. 정신 건강뿐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 말이다. 극명한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 1998년 ‘미국 예방의학 저널’에 실린 ‘ACE 연구(th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study)’다. 빈센트 펠리티 박사와 로버트 안다 박사 연구 팀이 쓴 논문이다. 무려 1만7,421명에게서 얻어낸 데이터가 기반이었다. 아동기의 경험을 묻는 10가지 항목(정서적ㆍ신체적ㆍ성적 학대, 신체적ㆍ정서적 방임, 가정 내 약물남용ㆍ정신질환, 어머니의 폭력 피해,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가정 내 범죄행위)으로 측정한 수치였다. 항목당 1점으로, 총 10점까지 ACE지수를 매기는 방식이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ACE지수가 4점 이상이면 0점인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높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은 3.5배나 많았다. 아동기의 유독성 스트레스와 그 이후 평생 지속되는 신체 변화와 건강 손상 사이에 의학적 관계가 존재함을 입증한 연구였다. 아동기에 겪은 불행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소아과 의사인 저자 네이딘 버크 해리스가 아동기의 불행이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다 찾은 강력한 실마리였다. 여정의 시작은 진료실로 찾아온 7세 남자 아이 디에고였다. 디에고의 엄마는 아이가 ADHD(주의력 결핍ㆍ과잉 행동 장애)로 의심된다며 데려왔지만, 상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만성 천식과 습진을 앓고 있었고, 키는 또래가 아닌 4세 아이 수준으로 작았다. 알고 보니 불과 4살 때 세입자에게서 성추행을 당했고 그 이후 ADHD 증세와 신체 이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거였다. 이를 계기로 탐구를 시작해 아동기 트라우마가 생존을 위해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최전선인 신경계와 스트레스 반응에 가장 민감한 호르몬계, 환경에 반응하며 발달하는 면역계에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열두 달간 매달린 끝에 얻은 성과였다.

저자인 네이딘 버크 해리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베이뷰 아동건강센터 진료실에서 일곱 살 남자 아이 디에고를 만나면서 아동기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심심 제공

거기서부터 진짜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진단을 했으니 이제는 처방을 해야 하니까. 저자는 아동기의 유독성 스트레스로 혼란에 빠진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진정시키고 증상을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찾아 적용했다. 수면, 식습관, 운동, 정신 건강, 인간관계였다. 여기에다 저자가 집중한 치료법은 마음챙김, 바로 명상이었다. 저자는 “이 여섯 가지 요소가 치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확신했다”며 “이 개입법들이 환자들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후원금 모금과 시드 펀딩을 거쳐 아이들을 위한 건강(Wellness) 센터를 세우기에 이른다. 디에고를 만난 지 약 3년만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아직 중반 밖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2040년의 시점으로 적은 에필로그는 그의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ACE 검사가 임신부들에게도 산전 건강관리의 일환으로 제공되고 학교에서도 예방접종처럼 ACE 검사를 실시하며, 교사의 연수 내용에도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에 대한 인식을 포함시키는 것 말이다. ACE 검사와 치료, 연구에 연방 기금을 제공하는 ‘회복탄력성 투자법’ 제정도 저자의 미래에 있는 구상이다. 저자가 디에고를 만났던 2008년, 별다른 호기심 없이 처치했다면 이런 꿈을 꾸기는커녕, 이 책조차 나오지 못했을 거다. 수기와도 같은 서사적 기술, 촘촘한 팩트와 다수의 연구 결과, 저자의 의사로서 열정이 어우러져 책장 넘기는 손을 바쁘게 만든다. “문제를 직시할 용기를 가질 때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생긴다”는 저자의 믿음이 세상을 바꿨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네이딘 버크 해리스 지음ㆍ정지인 옮김
심심 발행ㆍ448쪽ㆍ1만9,800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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