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반공주의와 독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고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을 만들 수 없게 하면서, 한국 민주주의는 중도와 우파만의 경쟁의 장이 됐다. 왼쪽 날개를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지역주의, 반공주의, 반북주의, 세대 담론 등을 더 중요시 여길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더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국가 중에서 한국처럼 찬란한 성공을 거둔 사회가 있을까? 1960년 156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DP는 2018년 3만달러를 넘었다. 외형적 규모만이 아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19년 한국의 국가경쟁력 순위는 13위에 이른다. 양만큼이나 질도 성장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오랜 독재를 경험했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세 차례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민주주의는 공고해져 가고 있다. 특히 지난 보수정부 9년 동안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지만, 시민의 역량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백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의 요구를 평화적으로 주장하는 모습은 서구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과 같았다. 얼마나 흥미로웠으면 유럽 학자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연구하려고 직접 집회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선진 행정을 배우기 위해 파키스탄과 필리핀에 공무원을 파견했던 한국이, 한때 GDP의 20%가 넘은 원조를 받았던 한국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국가가 되었다. 가슴 벅찬 일이다.

그러나 그 대단한 성공만큼 그림자도 크다. 정작 우리의 삶의 만족도는 전쟁 중인 국가보다 낮다. 1990년대 초부터 증가하던 소득 불평등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성장은 이제 불평등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확대시키고 있고, 민주주의가 선거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자 정권을 교체해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도대체 왜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성공했던 그 이유가 바로 덫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부를 재벌 대기업에 몰아주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성공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심화시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출이 한국 경제를 이끌면서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터인 중소기업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낮은 생산성의 상징이 되었다. 현실이 이렇게 변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기성세대도 청년세대도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다.

가끔 복지국가가 대안으로 이야기되지만, 경제성장이 일자리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자리가 자신의 소득을 높이고, 낮은 세금으로 시장에서 민간보험과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었던 중산층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다. 실제로 잘 고른 아파트 하나가 평생을 보장해 주는 세상에서 자신의 세금을 늘려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공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그런 역량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반공ᆞ반북과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며 독재를 용인했던 과거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반공주의와 독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고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을 만들 수 없게 하면서, 한국 민주주의는 중도와 우파만의 경쟁의 장이 됐다. 왼쪽 날개를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보다 지역주의, 반공주의, 반북주의, 세대 담론 등을 더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

결국 한국 사회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그 성공의 유산을 버려야 한다. 성공의 대가가 컸듯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도 클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100년 전 그 누구도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만, 우리는 그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었다. 어렵겠지만, 우리가 성공의 이유라고 믿었던 반공ㆍ반북주의, 재벌이 주도하는 수출 중심의 성장제일주의를 버린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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