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느끼듯 자기 자식 가르치기가 제일 어렵다. 부모로서 몇 마디 좋은 말이라도 해줘야 할 텐데 이게 참 어렵다. 그래서 옛 글에서 지혜를 빌려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중국인들이 신기묘산(神機妙算)이라고 칭송하고, 삼국지 팬들에게 지혜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제갈량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제갈량은 17세에 혼인을 했는데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부득이 동생의 아들 제갈교를 양자로 들였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47세에 아들 제갈첨이 태어났다. 그 귀한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보내준 편지가 ‘계자서(誡子書)’이다. 86자 전문을 소개해 본다.
“군자는 평정심으로 수신하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 욕심 없이 담담해야 의지를 분명히 할 수 있고, 고요하게 집중해야 원대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고요함 속에서 공부가 완성되며 재능은 공부에서 얻어진다. 공부해야 재능을 넓힐 수 있고 의지가 있어야 공부를 완성할 수 있다. 방종하고 태만하면 정신을 연마할 수 없으며 거칠고 조급하면 성정을 도야할 수 없다. 순식간에 나이가 들고 의지도 세월 따라 약해지면, 결국 쇠락하고 쓸모가 없어져 세상에서 버려진다. 그때에 쓸쓸히 궁색한 집구석을 지키면서 후회한들 어찌하리.”
수신(修身)과 입지(立志)의 자세를 요약한 명언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이 여기서 나왔다. 중국인들 집에 가면 이 글귀를 써서 걸어 놓은 경우가 많다.
죽음을 예견 했던 걸까. 이 글을 보낸 해에 제갈량은 54세로 전장에서 생을 마친다. 그때 제갈첨은 8세였다. 그래서인지 글을 볼 때 마다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 어린 아들이 무얼 알겠는가. 그래도 애절한 마음으로 붓을 잡아 글을 써내려간 아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갈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후일 촉한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263년 위나라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아들 제갈상과 함께 전사한다. 역사 앞에 인생이란 이렇게 비감한 것인지. 정녕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인가. 제갈첨의 비극은 제갈량의 일생을 더욱 고단하고 슬퍼 보이게 한다. 그래도 애써 위안해 보면, 제갈량은 후인들에게 자식 교육의 좋은 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니 ‘계자서’에 들인 정성이 헛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자식 교육을 위해서 고심한 부모들이 만든 결정체가 ‘가훈(家訓)’이다. 가훈(家訓)이라고 하면 근면, 정직 등등 간단한 몇 마디 좋은 말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원래 가훈은 책 이름이었다.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 양(梁)나라 출신 안지추(顔之推)가 저자이다.
그의 ‘가훈’은 여타의 가훈과 구별하기 위해 ‘안씨가훈’이라 부르는데, 총 20편 약 5만 여자로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자신의 생각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중국에서는 ‘안씨가훈’을 ‘가훈의 시조(家訓之祖)’라고 평가하고 있다.
안지추가 ‘가훈’을 남긴 데는 사연이 있다. 그는 9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동생이 불쌍했던 큰 형은 그를 응석받이로 키웠다. 한없이 너그럽지만 위엄이 없는 형이 아버지 노릇을 하면서 안지추는 멋대로 생활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술독에 빠져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무위도식하던 그에게 24세에 겪은 조국의 멸망은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로부터 포로 생활이 시작된다. 정말 운도 없는지 끌려간 나라도 또 망해서 계속 유랑의 신세였다.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를 거쳐 수(隋)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느낀 모든 것들을 가훈을 통해 후손들에게 말하려 한 것이다. 너무 할 말이 많았는지 자신의 기막힌 인생 유전을 ‘논어’의 편수에 따라 20편으로 정리하였다. 자신의 경험담과 생각을 적절히 섞어 글을 풀었는데 마치 한 편의 자서전을 읽는 것 같다.
그가 서위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같이 끌려간 양나라 귀족들은 공리공담에만 익숙할 뿐 세상의 실무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자들이었다. 입들은 살아있고 지식인 행세를 하니 문서 정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심지어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자가 태반이었다. 서위의 권세가들은 하사받은 양나라 귀족 출신 포로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공밥을 먹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안지추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이 무엇이든 기술 하나는 익혀야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기술 가운데 가장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 공부라고 강조하고 있다.
“무릇 배움이란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봄에는 그 꽃을 즐기고 가을에는 그 열매를 얻는 것이니, 서로 토론하고 글을 짓는 것은 봄의 꽃이요,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것은 가을의 열매이다.”
안지추는 ‘춘화추실(春華秋實)’이란 성어로 공부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개괄하고 있다. 우리네도 자식에게 늘 공부 타령을 하지만, 제갈량과 안지추가 강조하는 공부와는 결이 달라 보인다. 그들이 말한 공부는 바른 사람 만들기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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