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개봉되었다. 담당 형사였던 송강호가 마치 범인을 노려보듯 스크린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의 노려봄에는 ‘너’는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집념이 응축되어 있었다.
자칫 영구 미제가 될 뻔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건 경찰의 집념어린 수사, 그리고 DNA 분석기술의 획기적인 발전 덕분이다. DNA 분석기술은 해가 다르게 진보해 왔다. 발전된 DNA 분석기술에 힘입어 예전보다 더 적은 양의, 더 많이 손상된 DNA도 이제는 훨씬 정확하게 분석해 범인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DNA분석 못지않게 강력 미제사건 해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과학수사기법 중 하나가 지문분석이다. 지문분석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일부분만 남은 조각 지문인 ‘쪽지문’만을 가지고도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으로 범인을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2013년 필자가 부산지방검찰청에 부임하였을 때 2000년에 발생한 부산 온천동 오락실 여종업원 강도살인 사건이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쪽지문의 성공적인 재감식에 힘입어 공소시효 만료를 불과 1년4개월 앞두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사건의 범인은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공소시효가 폐지된 살인 사건의 경우 2019년 현재 268건의 범인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고통에는 공소시효가 없는 법이다. 범죄를 억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범죄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붙잡힌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첨단 과학수사역량의 강화를 위해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이유다.
국가는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책무를 지닌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시민의 자유와 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최근 들어 재심 재판을 다룬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례들이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첨단 과학수사는 사악한 범죄자를 찾아내는 강력한 무기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 주는 인권지킴이 역할도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오래 전부터 ‘이노센스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라는 민간단체가 결성되어 억울한 처벌 사례를 해결하는 일을 실천해 오고 있다. 1992년 시작된 독립 민간기구인 이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지금까지 사형수 20명을 포함해 총 362명의 무고한 형복역자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아울러, 미국의 연방정부와 대부분의 주들은 ‘억울함 방지법(Innocence Protection Act)’을 시행하고 있다. 살인, 성폭력 등 강력사건의 DNA 증거는 영구 보존하도록 의무화하고, 피고인에게 유죄 확정 이후에도 일정한 요건하에 DNA증거에 대한 재감정을 요청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발전된 DNA 재감정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제임스 베인이라는 사람은 DNA 재감정을 통해 35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칠 수 있었는데, 교도소에 19세에 들어갔다가 54세가 되어서야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미국의 ‘억울함 방지법’ 같은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때가 되었다. 중형이 선고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DNA 증거를 영구 보존하도록 의무화하고, 판결 확정 후에도 DNA 재감정을 통한 재심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억울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민주인권국가로 진일보하는 길일 것이다.
김희관 변호사ㆍ전 법무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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