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테 프레베르트 인간개발 분야 막스플랑크 연구소장 인터뷰
감정사 연구 권위자, 독일사 100주년 감정 키워드로 전시
독일 역사에서 숫자 ‘9’는 특별하다. 최초의 독일 민주주의라 할 바이마르공화국은 1919년 탄생을 알렸고, 나치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해는 1939년이었다. 1949년에는 동서독 정부가 수립되며 분단의 아픔을 겪었고, 1989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갑작스런 통일의 시대를 맞이했다. 2019년은 바이마르공화국 탄생 100주년,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 해다.
이에 맞춰 독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가 이달 말까지 서울대에서 열린다. 공포, 열광, 혐오, 공감, 격분, 향수, 호기심, 부끄러움, 연대 등 20개의 다양한 감정을 키워드로 독일의 현대사 100년을 정리한 ‘감정의 힘, 독일 19│19’다. 독일 외교부까지 후원에 나선 이 전시는 전 세계 3,000여곳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를 총괄 기획한 사람은 감정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우테 프레베르트 인간 개발 분야 막스플랑크 연구소장이다. 지난 7일 한국연구재단 서울청사에서 만난 그는 “모든 정치 시스템은 복잡한 감정체제의 산물”이라며 “어떤 감정이 왜 발생하는지 감정의 실체를 자각하고, 그 감정을 스스로 잘 길들일 수 있을 때 사회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서독과 동독은 통일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 만큼 심리적 거리도 좁혀졌을까. 프레베트르 소장은 “(독일 통일 전에) 구소련이 급격히 붕괴됐다. 당시 우리에겐 ‘시간이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다’”는 말로 갑작스레 통일이 이뤄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불현듯 닥친 통일의 대가는 컸다. 오늘날 동서독을 지배하는 감정의 격차는 또 다른 장벽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의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조건은 분단 시절보다 크게 개선됐다. 그런데도 동독 지역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동독에서 득세하는 건 하나의 증거다.
프레베르트 소장은 그 분노의 기반을 ‘치욕’의 감정으로 설명했다. 통일 이후 새로운 삶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실망감, 그리고 부끄러움이 치욕으로 전환됐다는 것. “동독 사람들은 3가지 개념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요. 억압적 사회주의 체제의 동조자, (통일 전후로) 사회를 이끄는 주체가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난 객체, 지금은 희생자라는 거죠.” 통일 독일에서 동독 출신들이 사회 지배계층에 진입하지 못한 것이, 통일 이후 태어난 자식 세대에까지 절망감을 전수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치욕이란 감정을 동독 전체를 대표하는 정체성이라고 단정지어선 안 된다고 프레베르트 소장은 강조했다. 통일 독일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세력과 이를 따르는 집단은 실제로는 통일 이전 동독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fD를 이끄는 정치인들 중에 정작 동독 출신은 없다. 극우 지지 세력은 이민자 반대를 외치지만, 동독 지역에는 이민자가 없어 그들이 일자리를 위협받을 일도 없다. 과거 동독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자연스러운 정서라기보다는, 정치세력들이 현실을 왜곡하며 만들어낸 인위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독은 이런 동독의 감정에 ‘좌절’을 느끼고 있다. 임금을 동결하고, 복지비용을 삭감하면서 동독 투자를 위한 통일 비용을 댔던 서독 국민들 입장에선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프레베르트 소장은 “서독 지식인들 사이에선 (동독) 파시즘에 맞서 다시 장벽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농담으로 나올 정도로 좌절감이 크다”고 말했다.
극단적 감정의 대립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부정적 감정이 넘쳐나고, 정치인들은 그 감정을 갈등을 증폭시키는 도구로 이용하려 들고 있다. 이에 프레베르트 소장은 “감정을 길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감정을 억누르라는 게 아닙니다. 감정을 잘 조절하자는 겁니다.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말고, 한 차원 높은 싸움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보고 증오하는 감정을 쏟아내기만 하면 어떤 논쟁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집중해야 하는 건 ‘감정을, 논쟁을 어떻게 문명화하는 것이냐’입니다.”
프레베르트 소장은 이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최근 독일 시민들 사이에서 서로 다름과 갈등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대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자이트 온라인(Zeit Online)이란 매체에서 만든 ‘my country talks’가 대표적인데, 신념과 견해가 다른 시민들이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오프라인에서도 만나 토론하는 정치 플랫폼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치 세력이 우리의 감정을 이용하려 들지 않는지 의문을 품고 감시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우리는 정치가들의 언어를 면밀히 분석해야 합니다. 그들이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구사하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우리의 감정을 극단으로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정치적 도구화와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보다 냉정해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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