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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에노의 케이

입력
2019.11.18 04:40
수정
2019.11.18 11:1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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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케이를 처음 만난 건 시리아 알레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였다. 14년 전 시리아는 여행자의 천국이었고, 알레포는 터키에서 국경을 넘은 여행자들이 본격적인 중동 여행에 앞서 묵어가는 도시였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테이블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고, 스물셋의 나와 스물넷의 케이는 그때 처음 만났다. 내 시집은 한국어였고 그녀의 가이드북은 일본어였다.

그녀는 머리를 다 말리고 테이블에서 맥주를 한 병 마셨다. 둘 다 혼자였고 행선지는 같았다. 나도 맥주를 한 병 주문하고 우린 곧 친구가 되었다. 그 길에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이제 같이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다음 도시로 향하는 버스를 같이 탄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그녀와 나는 같이 시리아의 홈스로 향했다. 이후 우리는 같이 국경을 다섯 개 넘었으며 중동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다.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끝없이 취한 대화를 나누었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고국으로 돌아와 끈질기게 이메일로 각자의 삶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멀었고, 나는 일본에 가본 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는 케이가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이 년쯤 지난 뒤, 갑자기 호주에 갈 일이 생겼다. 방학 한 달 동안 시를 쓰기로 했다. 기적적으로 일본에 스톱오버하는 저렴한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경유지는 도쿄였다. 나는 케이가 도쿄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출국 전날 부랴부랴 케이에게 이메일을 썼다. 내일 만나자고.

초행인 도쿄에서 약속 장소를 정해야 했다. 지하철 노선도를 찾아 멋대로 장소를 정했다. 공항에서 바로 닿는 우에노역이 교통의 요지 같아서 좋겠어. 위치는 아사쿠사 방면으로 가는 기차의 맨 앞 승강구면 되겠지. 케이. 나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도쿄에 가. 두 시부터 삼십 분만, 그곳에서 기다릴게.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메일은 일부러 컴퓨터를 켜고 접속해야만 확인할 수 있었고, 연락이 뜸해져 마지막 이메일은 한 달 전이었다. 케이가 우에노에서 너무 먼 곳에 살고 있거나, 어딘가로 여행을 갔을 수도 있었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이 있을 수도 있었고, 아사쿠사 방면으로 가는 노선이 단 하나뿐인지도 알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케이가 나를 보러 나와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케이는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도쿄 입국 심사대에서 스톱오버 비자를 받아 공항선에 오를 때에도 가능성을 셈하며 케이를 생각했다. 기차는 느릿느릿 우에노역에 도착했다. 낯선 일본어 간판이 번쩍거리는 복잡하고 큰 역이었다. 아사쿠사로 가는 기차는 그중에서도 벌판 같은 곳에 있었고, 맨 앞 승강구는 아주 외딴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내려 케이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처음 보는 일본의 기차와 벌판 같은 풍경을 보고 우연 같은 것을 생각했을까. 케이는 십오 분 늦었다. 그녀는 글썽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세상에. 이메일을 두 시간 전에 확인했어. 집이 여기서 멀단 말이야. 우에노역 아사쿠사 방면의 맨 첫 번째 승강구라니. 미쳤어. 전날 연락해서 이런 곳에 나와 있다니. 정말 너답단 말이야. 잘 지냈어?"

그 뒤로 불가능한 것을 떠올릴 때면 우에노의 케이를 생각한다. 닿지 않는 마음이나 멀리 있는 그리운 것을 생각할 때, 문득 이메일을 보내 내일 내가 거기에 있겠어, 라고 말하고 벌판 같은 역에서 케이를 기다리던. 그건 어쩌면 마음이란 것이 돌부리에 치이듯 가닿는 기적 같은 순간이라고. 그렇게 글썽이던 케이가 그 자리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워하고 있으면 일생 언젠가 한 번은 만나게 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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