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가 진범” 결론 냈지만
과거 경찰 향한 비판 여론 일어
“잃어버린 나의 인생 20년을 누가, 어떻게 보상 할 것인가.”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옥살이까지 한 윤모(52)씨가 지난달 27일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던진 하소연이다.
그는 당시 “그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화성사건의 진범)이춘재 자백이 없었으면 내 사건 묻혔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윤씨의 진술 대로 경기남부경찰청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도 15일 “이춘재를 8차 사건 범인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고 밝혔지만, 후폭풍이 거세다. 재수사 착수 후 처음으로 윤씨가 범인이 아니란 걸 공개적으로 시인한 건데, 이를 접한 여론은 들끓었다. 경찰이 앞날이 창창한 20대 청년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경찰 발표로 과거 경찰 수사의 강압과 사건 조작 의혹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윤씨의 재심을 돕는 법무법인 다산도 경찰조사의 심각한 오류를 짚었다. 다산은 이날 윤씨를 검거한 경찰이 당시 작성한 진술조서 2건과 피의자신문조서 3건, 윤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들 자료 내용은 윤씨가 범행을 시인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그러나 윤씨 자백내용이 범행 현장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윤씨가 사건 피해자인 박모(당시 13세)양 속옷을 무릎 정도까지 내린 상태에서 범행하고 다시 입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박양은 그날 입고 있던 것이 아닌 다른 속옷 하의를 뒤집어 입고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 역시 윤씨 진술과 현장은 불일치했다.
윤씨의 재심을 돕는 박준영 변호사는 “윤씨의 조서 내용과 현장상황이 다른 건 현장상황을 잘 모르는 경찰이 준 정보대로 윤씨가 진술했기 때문”이라고 조작의혹을 제기했다. 앞서 박 변호사는 “글도 잘 모르는 윤씨가 고급 단어를 구사하며 진술서를 작성했는데, 누군가 진술서 내용을 불러주거나 보여준 대로 쓰게 한 정황”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찰도 이날 피해자 방안에 있던 책상 위 발자국 상태가 윤씨의 신체와 다른 점, 윤씨가 현장 검증 당시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들어갔다고 밝혔지만, 윤씨 지문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들어 과거 경찰 수사의 잘못을 인정했다.
강압조사의 정황은 윤씨 입을 통해 나왔다. 윤씨는 “과거 경찰 수사 받을 당시 몇 차례 구타당했고 3일 동안 고문까지 당했으며 그러는 동안 잠은 못 잤다”고 털어놨다.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8차사건 당시 경찰의 폭행과 고문 때문에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해왔다. 윤씨는 이런 정황을 토대로 지난 13일 수원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경찰은 윤씨에 대한 경찰 조사 당시 강압이나 고문 등 위법행위가 있었는지, 실제로 허위자백을 강요했는지, 당시 국과수 감정은 적정했는지 등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 양의 집에서 박양이 성폭행 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경찰은 이듬해 7월 윤씨(당시 22세)를 범인으로 검거해 강간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하면서, 이 사건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모방범죄로 보인다고 했다. 이후 윤 씨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 받아 20년을 복역한 끝에 2009년 가석방됐다. 그러다 최근 화성연쇄살인사건 진범으로 지목된 이춘재가 “8차 사건도 내가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경찰이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