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오디션 예능 부흥기를 이끌며 가요계를 호령하던 ‘프로듀스101’(이하 ‘프듀’) 왕국이 무너졌다.
쟁쟁한 가요 기획사들과 연습생들을 호령하던 ‘프듀’ 왕국 제작진의 민낯이 ‘욕망의 괴물’이었다는 사실은 대중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국민 프로듀서’의 등 뒤에 숨어 대범한 조작을 거듭해 왔던 이들의 몰락에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지난 7월 방송된 ‘프로듀스X101’(이하 ‘프듀X’)의 파이널 생방송 당시 공개된 대국민 문자 투표 득표수에 대한 의혹에서 출발한 ‘조작 논란’은 팬들의 분노와 탈락 연습생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더해지며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이후 엠넷이 경찰에 ‘프듀X’ 제작진에 대한 정식 수사를 의뢰했고, 수사 중간 결과의 윤곽은 약 4개월만인 지난 5일 ‘프듀X’ 연출을 맡았던 안준영 PD와 김용범 CP의 구속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안 PD가 연예기획사들로부터 총 1억 원이 넘는 유흥업소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안 PD는 ‘프듀48’과 ‘프듀X’의 최종 순위 조작 혐의를 인정한 데 이어, 지난 14일 ‘프듀’ 시즌 1, 2의 순위 조작 혐의 일부도 인정했다.
안 PD가 조작 혐의를 인정하며 데뷔조 발탁 이후 활동을 이어오고 있던 ‘프듀48’ 출신 아이즈원과 ‘프듀X’ 출신 엑스원에게는 ‘조작 그룹’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이들의 활동 당위성까지 의심 받으며 ‘사실상 활동 불가’라는 전망까지 쏟아져 나왔다.
또 종료후 해체한 아이오아이와 워너원 역시 조작 의혹을 받게 됐다. 또한 ‘프듀’ 전후로 론칭한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투명성을 의심 받으며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수사 중간 결과와 관련해 가장 큰 의문은 안 PD가 위험천만한 순위 조작에 뛰어든 이유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그가 다수의 연예기획사들로부터 총 1억 원에 달하는 유흥업소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 뿐인데, 접대 말고 데뷔조 순위 조작을 통해 취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던 건 아닐까.
’프듀‘의 경우, CJ ENM 내에서도 방송과 데뷔조 선발 이후 매니지먼트 등을 담당하는 음악사업 부서가 나눠져 있어 안 PD가 소위 ‘자신의 입맛대로’ 데뷔조를 선발한다고 방송 이후 부수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때문에 많은 연예계 관계자들은 접대 이외에 금전적인 대가 등이 오갔지 않겠냐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내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유흥 접대 외에 여타의 금전적인 거래가 있었거나, 워너원의 신드롬급 성공을 맛본 뒤 그에 준하는 화제성을 가진 성공작을 계속 만들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현재 수사 중인 사안인 만큼, 이후 수사 결과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금전적인 대가가 오갔지 않겠나 싶다”고 전했다.
앞서 구속됐던 안 PD와 김 CP가 지난 14일 검찰에 송치된 가운데, 경찰은 신형관 CJ ENM 부사장 겸 엠넷 부문 대표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투표 조작의 ‘윗선’ 개입 여부에 대한 수사를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실제로 엠넷 측은 당초 ‘프듀’의 조작 논란에 대해 “성과급을 노린 일부 제작진의 일탈”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이번 사태를 두고 ‘윗선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은 앞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안 PD의 조작 이유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계자들의 시각 역시 ‘윗선’을 향하고 있었다.
한 엔터 관계자는 “안 PD 역시 한 조직에 속한 일원으로서 (윗선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라며 “’프듀‘ 시리즈로 성공하긴 했지만, 이번 프로그램 외에도 향후 다른 프로그램들을 론칭 하면서 계속 CJ ENM 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만큼, 만약 윗선이 있었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을 거다”라고 추측했다.
이어 “’프듀‘ 시리즈가 시즌1, 2를 거듭하며 신드롬급 흥행에 성공하며 안 PD는 가요 기획사들에게 있어 ‘아이돌의 군주’처럼 군림하는 존재였다”며 “’프듀‘에 소속 연습생을 출연시키기 위해 기획사들이 공을 들였던 것들을 미루어 봤을 때, 이번에 경찰 조사를 통해 밝혀진 유흥 접대 중 상당수가 당장의 조작을 위한 접대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의문은 안 PD가 허술하게 조작한 득표수를 왜 그대로 생방송에 노출했을까다.
한 예능국 작가는 “아마 ‘프듀’ 제작진들은 (이번에도) 조작이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해당 순위 결과가 조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역시 안 PD나 김 CP를 비롯해 제작진 중 극히 일부였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조작을 공모했던 이들의 안일했던 생각이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 아니겠나”라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한 엔터 관계자는 “결론적으로 요즘 팬들이 이렇게까지 투표 결과를 두고 디테일하게 뒤집어 놓을 거라는 생각을 못한 거다. 트렌드를 못 읽은 셈”이라고 꼬집었고,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앞선 성공에 취해 치밀하지 못했던 것 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엠넷의 ‘효자’ 시리즈로 꼽혔던 ‘프듀’가 전 시즌 조작이라는 유례없는 사태의 중심에 선 가운데, 그간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만을 고수하던 엠넷 측은 이제서야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진정으로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현재 회사 내부적으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에 따른 합당한 조치와 피해보상, 재발방지 및 쇄신 대책 등을 마련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제작진 개인의 일탈’ 등을 주장하며 안 PD 등 관련 제작진의 ‘꼬리 자르기’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던 태도는 문제의 조직원부터 ‘손절’해 버리는 회사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며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엠넷 역시 PD들에게 각 연출 프로그램의 흥행, 화제 여부에 따른 성과급 제도를 갖추고 있다”며 “다만 그 흥행에 따른 성과급만을 노리고 순위 조작에 가담했다 기엔 굳이 조작이 갖는 높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이어 “물론 조작 자체는 당연히 밝혀져야 할 일이고, 잘못된 문제임이 맞지만 조작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당시 엠넷 측이 내부 감사를 통해 진위를 파악하고 대국민 사과 및 피해보상, 제작진 정직 등의 조치, 향후 대책 마련 등 절차를 밟아 나갈 수도 있었다”며 “하지만 채널은 바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고, 이후 제작진의 조작을 ‘성과급을 노린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며 회사와 선 긋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결국 회사 역시 아직 모든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인 셈인데, 어찌 보면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아닌가 싶다”고 꼬집었다.
여전히 ‘프듀’에 대한 경찰 조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안 PD를 중심으로 한 제작진의 조작 이유 역시 아직까진 명확하지 않다. 그들이 저지른 범법 행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야 당연히 취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왜’ 프로그램 조작을 무감각하게 자행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원인 파악을 통한 향후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일 것이다. 여전히 많은 서바이벌 오디션 예능이 론칭을 앞두고 있으며, 또 다른 ‘욕망의 괴물’은 언제든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홍혜민 기자 hh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