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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내 친구, 로맨티스트!

입력
2019.11.16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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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흑! 부러워. 일가친척 다 모여서 수백 포기 김장을 담그는 거, 내가 진짜루 해보고 싶었던 일이거등. 말하자면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랄까.” 친구의 버킷리스트라는데 까짓 거, 내가 도와주지 뭐.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서울을 출발했다. 8시 갓 넘은 시간인데도 그곳에서는 배추 씻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400포기 넘는 배추군단의 실물을 영접한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아흑! 부러워. 일가친척 다 모여서 수백 포기 김장을 담그는 거, 내가 진짜루 해보고 싶었던 일이거등. 말하자면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랄까.” 친구의 버킷리스트라는데 까짓 거, 내가 도와주지 뭐.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서울을 출발했다. 8시 갓 넘은 시간인데도 그곳에서는 배추 씻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400포기 넘는 배추군단의 실물을 영접한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낭만은 대개 상상의 영역에 머문다. 어린 날의 내가, 기숙학교 다락방에 앉아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눈물짓던 ‘소공녀’ 속 세라를 동경한 것처럼. 이 나이를 먹고도 저 멀리 남프랑스 어느 마을에 사는 포도농장 안주인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인 즉, 건초더미에 몸을 누인 채 굳어버린 빵을 꾸역꾸역 욱여 넣은 날들 이후에도, 흙먼지 풀풀 날리는 포도밭에서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포도를 수확하고 나서도 그 삶의 미덕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로맨티스트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짜 촌구석 출신인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신음 같은 감탄사를 흘리는 친구가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서울의 부유한 집에서 자란 티가 좔좔 흐르는 그는 종종 나를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튀어나온 인물쯤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그런 그가 특히 부러워하는 게 있었으니, 이맘때 우리집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김장 담그기였다. “아흑! 부러워. 일가친척 다 모여서 수백 포기 김장을 담그는 거, 내가 진짜루 해보고 싶었던 일이거등. 말하자면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랄까.”

친구의 버킷리스트라는데 까짓 거, 내가 도와주지 뭐. 작년 김장 날을 받아놓고 ‘체험, 삶의 현장’을 제안했을 때, 친구는 방방 뛰며 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왕 체험하는 일이니 한 달 전부터 시작되는 마늘 까기나, 생강과 쪽파 캐서 다듬는 작업부터 투입하고 싶었다. 그러자니 동행하는 내 시간이 너무 많이 깨졌으므로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나와 친구의 시간 및 체력을 감안해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김장 전날, 소금에 절인 배추를 씻는 단계부터 나서기로 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서울을 출발했다. 8시 갓 넘은 시간인데도 그곳에서는 배추 씻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400포기 넘는 배추군단의 실물을 영접한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위아래 방수복으로 갈아입은 우리 둘도 작업에 돌입했다. 난생처음 하는 일임에도 친구는 야무지게 임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오전이 다 가도록 그는 직경 8㎝ 파이프에서 콸콸 쏟아지는 지하수 앞에 앉아 배추를 씻고 나르는 일을 묵묵히 해냈다. 육체노동에 단련되지 않은 손목이 뻐근하련만 몸에 밴 교양미 덕인지 세척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힘들다는 말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머슴밥처럼 푸짐한 점심밥을 먹고 난 뒤, 김장 속을 만들 차례였다. 며칠에 걸쳐 미리 다듬고 씻어놓은 갓과 파, 양파, 무, 사과, 배 등등을 채 썰고 갈아내는 일. 철들고 난 후 거의 매해 김장 만들기에 동원됐던 나에게도 끝까지 녹록지 않은 단계가 바로 이 과정이었다. 두어 시간 지났을 즈음, 양파 썰던 눈을 치켜뜨고 친구를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무쇠 칼을 손에 쥔 그의 눈꺼풀이 속절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애원하다시피 친구를 설득해 뜨끈하게 데워둔 돌침대에 눕게 했다. 저녁 먹는 시간 빼고 거의 열두 시간을 내쳐 잔 그는 이튿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지만, 온 몸의 관절은 그 기분에 동조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구부려지지도 펴지지도 않는 몸으로 배추에 양념 버무리는 작업을 해보려 용쓰던 친구는, 버킷리스트 실현 기념으로 얻은 김치 한 박스를 들고 상경해 일주일이나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번주로 잡힌 올해 김장 일정을 친구에게 알렸다. “어때, 한 번 더 가볼텨?” 그는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원래 버킷리스트란 한 번으로 충분한 것. 걱정 말라고, 작년 노동으로 5년 치 김장은 이미 확보했다고 알려주었더니 그가 고향에 계신 어른들께 전하라며 쇠꼬리 한 상자를 보내왔다. 오우, 나이스 로맨티스트!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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