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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도 능력? 美 명문 사립고의 삐뚤어진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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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도 능력? 美 명문 사립고의 삐뚤어진 ‘능력주의’

입력
2019.11.15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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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세인트폴 고등학교 지도. 재학생은 500명에 불과하지만 대학 캠퍼스 못지 않은 부지에 여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세인트폴고 홈페이지 캡처
미국 세인트폴 고등학교 지도. 재학생은 500명에 불과하지만 대학 캠퍼스 못지 않은 부지에 여러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세인트폴고 홈페이지 캡처

파키스탄과 아일랜드 출신 부모 아래 태어나 미국 뉴욕에서 성장한 셰이머스 라만 칸은 1993년 9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인 미국 부유층의 자녀만이 모여있다는 세인트폴 고등학교 기숙사에도 자신과 같은 이민자 가정 아이들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인트폴이 인종적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수 학생 기숙사’가 학내 따로 마련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란 것이다.

칸은 외과의사로 성공해 부를 거머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이곳에 진학했지만 그 시간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돌이킨다. 엘리트 친구들 사이에서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탓이다. 아이비리그를 택하는 친구들을 피해 작은 리버럴아츠칼리지(하버포트 칼리지)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칸은 계급 문제를 연구했고, 교사이자 연구자로 다시 세인트폴로 돌아왔다. 9년 만이었다.

‘특권’은 미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세인트폴 고등학교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분석한 칸의 체험적 연구서다. 왜 엘리트 학교교육은 어떤 이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한편 어떤 이들에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해 성취해야 하는 일이 됐는가, 이곳 학생들은 계속해서 최고 중의 최고란 이야길 듣는데 그 최고 중 대다수는 왜 부유층 출신인가 같은 질문에 답해가는 것이 칸 연구의 핵심이다.

1890년 세인트폴고의 모습. 세인트폴고 홈페이지 캡처
1890년 세인트폴고의 모습. 세인트폴고 홈페이지 캡처

칸은 무엇보다 ‘능력주의’를 주창하는 사회의 분위기에 비판적이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학생들은 이른바 능력이라 일컬어지는 특성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접근할 기회가 엄격히 제한돼 있는 탓이다. 세인트폴고 내부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가 있다. 단 500명의 학생들을 위해 수백개의 동아리가 생성되고 중국어, 라틴어, 희랍어 등 다양한 교과목에 각 교과를 심화할 세미나가 만들어진다. 모든 교사들이 하루 종일 캠퍼스에 살면서 항상 학생들을 위해 대기 중이다.

칸은 2004년 세인트폴고로 돌아간 직후 변화를 목격한다. ‘신(新) 엘리트’들의 등장이다. 백인 명문가 부유층이 여전히 지배적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되레 이들이 적응하지 못해 고립된 기숙사에서 지내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인종적ㆍ계급적 다양성이 커졌다. 오페라와 랩음악을 동시에 즐기면서, 어디 내놔도 평범한 미국 시민 같은 외양을 가졌으며, 고급 레스토랑과 패스트푸드점에서 똑같이 편안히 식사하는, 이전의 폐쇄적인 엘리트들과 다른 형태의 엘리트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신 엘리트들은 자신의 열린 태도를 강조하며 사회를 향해 ‘내 위치는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 아니라’는 서사를 구축한다. 기회의 불공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입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나는 이렇게 개방적이고 민주적이야! 너희들이 그런 위치에 있는 건 바로 네 자신의 편협함, 이 개방된 새 세상을 이용하지 않기로 한 네 자신의 선택, 네 자신의 관심 부족 때문이지, 지속적인 불평등 때문이 아니라고.”

칸은 신 엘리트들의 사회엔 다른 해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학교의 질도 낮고 방과후 프로그램도 거의 없으며 난관에 봉착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도 곁에 없는 학생들의 처지에 눈감는 대학 입시 제도와 사회 기반에 대한 고찰 등이 대표적이다. 자율형사립고, 외국어고,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교육 이슈를 두고 수년 째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주목해야 할 목소리다.

특권

셰이머스 라만 칸 지음ㆍ강예은 옮김

후마니타스 발행ㆍ419쪽ㆍ2만원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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