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 가족들조차 내가 힘든지 몰랐으니까. 난 혼자야.” 강아지 모습을 한 인스타툰 ‘디어 마이 블랙 독’의 주인공은 자책의 말을 이어간다. 주인공이 전하는 우울한 감성이 열 컷의 그림을 채운다.
여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중 인스타그램은 가벼운 내용이 게재되고, 그 내용이 가볍게 소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스타그램에 연재되는 만화, 인스타툰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인스타툰은 최대 10장의 사진까지 업로드가 가능한 인스타그램의 특성에 맞춰 9~10컷으로 구성된 짧은 만화를 일컫는다. 분량에 제약이 있는 만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개그나 소소한 일상을 주로 다뤄왔다.
하지만 인스타툰에도 최근 ‘진지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인스타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혼 여성이 겪는 성차별을 다뤄 33만 4,000팔로워의 폭발적 호응을 이끌어내고 ‘2017 오늘의 우리만화’를 수상한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대표적인 예다.
◇사회적 낙인 두려워하던 여성의 목소리 밖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흐름은 여성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이다. 익명성이 보장되고 손쉽게 계정을 만들 수 있다는 SNS의 장점이 특히 여성 작가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신상공개 두려움 없이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아리 작가의 ‘다 이아리’는 작가가 직접 겪은 데이트 폭력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홍녀 작가의 ‘다녀왔습니다’는 가상의 인물인 ‘이홍녀’ 계정을 만들어 이혼 여성에게 닥치는 일상의 차별과 편견을 실화처럼 그린다. 주인공이 혐오를 일삼는 주변인에게 던지는 ‘사이다 멘트’는 독자들에게 대리 만족을 선사하고 있다. 이아리 작가는 “‘며느라기’와 미투(#MeToo) 운동을 계기로 여성 작가들이 사회적으로 다뤄져야만 하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인, 장애인 등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도 인스타툰을 통해 발화된다. 예롱 작가의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는 가나에서 온 흑인 만니가 겪은 차별을 전하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 차별을 꼬집는다. 청각장애인의 일상을 그린 ‘소리 없는 세계’, 퀴어 커플의 에피소드를 담은 ‘너나둘이’도 우리 사회가 그간 외면해왔던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보다 가까운 데서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질병, 혼자만의 고통 넘어 공감대 형성
이전까지는 공론장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질환의 모습을 그려,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인 공감대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윤지회 작가의 ‘사기병’은 위암 4기를 판정 받은 작가의 투병기를 그려내 무기력하기보다 삶의 의지로 가득 찬 환자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인식시켰다.
사회적으로 터부시됐던 정신 질환을 다룬 작품도 눈에 띈다. ‘디어 마이 블랙 독’과 ‘판타스틱 우울백서’는 정신 질환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의문을 던지며 누구나 우울증에 걸릴 수 있음을 강조한다. ‘디어 마이 블랙 독’의 김늦가을 작가는 “제 만화를 보고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는 메시지를 자주 받는다”며 인스타툰이 불러온 변화를 전했다.
◇제약 사라지니 진솔한 이야기가…
심각, 진지한 인스타툰 주제들이 기존 만화 시장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행본으로 출간됐던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나 다음 웹툰 연재작인 단지 작가의 ‘단지’는 가정 폭력을 솔직하게 다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주류 웹툰 플랫폼에서 거쳐야 하는 검증 과정 때문에 이런 만화는 소수에 그쳤다. 이아리 작가는 “인스타그램에서는 스토리나 그림을 (플랫폼 측에) 검수받지 않기 때문에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다”며 “제약이 없어 솔직한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예롱 작가도 “SNS에서는 거친 말들을 검열 없이 올릴 수 있어 차별을 더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 작가와 독자가 만드는 확장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인스타그램의 특성 덕에, 인스타툰은 독자에게도 표현의 장이 된다. 인스타툰 댓글창에는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공감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논쟁까지 독자들의 적극적인 의견 교류를 볼 수 있다. 예롱 작가는 “차별은 주관적 영역이라 논란이 생기기도 한다”며 “그럴 때는 차별이다, 아니다 답을 내리기보다는 독자분들께 물음을 던져 댓글에서 함께 논의해갔다”고 말했다. 만화평론가 박석환 한국영상대학 교수는 “주류 시장에서 불편해했던 이야기들이 SNS로 옮겨가게 됐다”며 “플랫폼이 아닌 ‘좋아요’나 ‘팔로우’ 등 독자의 검증 과정을 거쳐 깊이 있으면서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주제들이 나왔다”고 분석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정해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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