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4>최정은 ‘윙’ 대표
조모, 부친에 이어 사회의 열외 여성들 자립 지원
카페, 식당, 목공소… 안 해본 것 없는 전쟁 같은 삶
“사람이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것 목도할 때 행복해”
사회의 열외자로 몰린 여성들에게 기꺼이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최정은 사회복지법인 윙 대표를 7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법인 건물에서 만났다. 그의 할머니 때부터 66년 간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한호 기자

비빌 언덕처럼 든든한 단어가 또 있을까. 무작정 기대고 투정 부려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미더운 존재, 그런 비빌 언덕 하나쯤 있으면 삶이 얼마나 안전하냔 말이다.

사회복지법인 Wing(윙)의 최정은(53) 대표는 한 명도 아닌, 1,500여명 여성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 언제나 무던하면서도 굳게 나를 보듬어 줄 듯한 비빌 언덕이 생각나는 이유다. 그의 지인들이 마치 호처럼 최 대표를 ‘비덕’(비빌 언덕을 줄인 말)이라고 부르니 이런 느낌은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게다가 그는 대를 이은 비덕이다.

윙이 들어선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터의 역사는 조모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벌써 예순여섯 살이 된 곳이다. 1953년 최 대표의 할머니 고 백수남 원장이 자신의 세례명을 따 미혼모를 돌보는 데레사 모자원을 만든 게 시작이다. 이어 산업화 시대 서울로 상경해 돈을 벌어야 했던 여성들의 거처가 되어 주고 직업 훈련을 돕는 사회복지법인 은성원을 거쳐, 1996년부터는 탈성매매 여성을 포함한 폭력 피해 여성들의 자활을 지원하고 있다. 은성원에서 윙으로 이름을 바꾼 건 아버지를 이어 이곳을 꾸리게 된 최 대표의 아이디어다.

그런데 최 대표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버팀목 같은 비덕은 아니었다. 때로는 몰아치고, 때로는 부추기고, 때로는 함께 걷고, 때로는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윙이 벌인 사업만 피부관리숍, 덮밥집, 분식집, 카페, 대안문화공간, 목공작업장, 핸드메이드 제품 제작, 천연염색, 소셜 키친, 소셜 다이닝까지 열 손가락을 넘기니 그가 왜 “전쟁 같은 세월이었다”고 하는지 짐작이 된다. 여기다 인문학, 영상 제작,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까지 기꺼이 빌렸다. “모퉁이에서 방향을 틀 듯, 더 나은 길을 찾아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정말 정신 없지요?”

왜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탈성매매 여성은 복합적인 폭력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가출을 하고 ‘숙식 제공’이라는 구인광고에 티켓다방 같은 성매매 업소에 발을 디디게 되곤 한다. 그 뒤로는 온갖 폭력,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이 폭력을 피하려다, 저 폭력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 제정으로 탈성매매 여성의 자활을 돕는 제도가 마련됐지만, 그 제도의 수혜를 입을 수 있도록 여성들과 부대끼며 이끄는 건 최 대표 같은 현장 활동가들의 몫이다.

한 때는 그도 이 여성들을 작은 가게나마 사장으로 만들거나, 번듯한 기술을 가르쳐 취직을 시키는 게 성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노동을 척추 삼아, 자신의 두 다리로 삶을 버티고 서게 되는 것이야 말로 그가 바라는 일이다. 그 시작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뭐 별거냐 싶지만 별거인 이 세 마디는 다른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는 실마리이자 마지막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아 사람이 싫어지고 사람이 무서운 피해자들에게는 이 세 마디가 특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거다.

날개로 펄펄 날아 오르는 미래를 욕망했던 최 대표는 이제는 어우러져 얽히고설키는 넝쿨 같은 성장을 꿈꾼다. 그를 7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복합문화공간 곁애(愛)에서 만났다. 66년 전 그녀의 할머니가 만든 데레사 모자원의 그 자리다. 사회복지법인 윙에는 자활지원센터 넝쿨, 소셜 다이닝 공간 비덕살롱, 카페인 곁애가 함께 있다.

◇가장 먼저 식판을 바꿨다
그가 여성들의 삶을 가장 처음 맞닥뜨린 건, 부친의 사업을 도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다. ‘미싱사’ 언니들의 삶이 그땐 그저 답답해 보이기만 했다. 이한호 기자
-할머니 때부터이니 이곳에 어린 시절 기억도 있겠네요.

“크리스마스 때 언니들하고 파티했던 기억이 있어요. 몇 백 포기씩 김장한 일도 생각나고요.”

-할머님은 왜 사회복지시설을 하시게 됐나요.

“할머니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도 다녀오신 신여성이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서른 살도 안돼 혼자가 되셨죠. 종로에서 양장점을 하셨는데 돈을 꽤 버셨다고 해요.”

-최 대표는 원래 의상 디자이너로 직장에도 다녔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했어요. 커리어 우먼을 꿈 꿨죠. 의상 디자이너로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가 하던 의류제조 회사의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때 정말 제 삶은 잿빛이었죠. 2년도 안 돼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갔어요.”

-왜 힘들었나요.

“공장의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았어요. ‘미싱사’ 언니들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무력하고 답답하게 느껴졌죠. 공장에서 죽어라 일한 돈을 남자한테 뜯기거나 사기 당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저와는 다른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공장을 관두고 의류 회사에 디자이너로 들어갔는데 2년 만에 그 회사가 망한 거예요. 또다시 아버지 공장으로 왔는데 그때는 그들이 달리 보였어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삶이 있다’고 이해가 되더군요.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복지사업을 이어 받아 하게 됐고, 저도 함께 시작했죠. 1997년 3월의 일이네요.”

당시 은성원은 윤락행위등방지법(윤방법)에 근거를 두는 선도보호 시설이었다. 윤방법이 폐지되고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면서 은성원도 탈성매매 여성의 쉼터와 자활시설로 전환했다.

-처음 은성원에 갔을 때 어땠나요.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그릇을 바꾼 거였어요. 제 힘으로 당장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가서 보니 식판이 너무 오래돼서 꼬질꼬질한 거예요. 시설은 열악하지만, 밥은 좀 괜찮은 데 담아 먹자고 해서 하얀 식판으로 바꿨죠.”

-아버지에 이어서 자활센터 대표를 하면서 이름도 은성원에서 윙으로 바꿨죠.

“당시 성매매방지법 제정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때였어요. 그 시기에 저도 대학원에 가서 사회복지학으로 석사 학위도 땄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안한 거예요. ‘내가 10년 후에도 이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싶었죠. 그래서 우리 조직의 비전을 다시 점검해 보자고 해서 외부 단체에다 컨설팅까지 맡겼어요. 1년에 걸쳐 컨설팅을 받으면서 구성원들과 토론해서 나온 개념이 ‘여성의 주도성’이었죠. 우리의 삶을 우리가 디자인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법인의 이름도 은성원에서 윙(Women Initiative Networking Growing)으로 바꾼 거죠. 윙이라는 발음이 발랄해서 이름을 먼저 정해 두고 뜻을 붙이면서 이니셔티브를 활용한 거예요. 그 시절에 정말 많이 고민하고 별별 시도도 다 했죠.”

-어떤 것들을 했나요?

“쉼터 중심에서 센터로 가자는 구상이 그때 나왔죠. 또 우리 내부에서부터 피해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용어는 쓰지 말자는 아이디어 같은 것도요. 예를 들면, 사례회의란 말이 있었거든요. 피해 여성 한 명을 케이스로 보고 회의를 하는 거였어요.”

◇피해 여성들과 인문학 공부한 이유
사회복지법인 윙의 역사는 1953년 데레사 모자원으로 시작해 벌써 66년이 됐다. 산업화 시기엔 생업전선에 내몰린 여성들의 직업훈련을 맡았다. 윗줄 왼쪽은 초창기 은성원의 건물. 지금의 윙도 같은 자리다. 윙 제공

그즈음 치유의 글쓰기 수업에 이어 인문학 아카데미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는 누구나 훔쳐갈 수 있지만, 내면의 힘은 그럴 수 없다’는 이숙경 영화감독의 말이 영감을 줬다.

“내면의 힘은 뭐지, 어디에서 비롯되지 고민을 했죠. 그래서 철학 수업을 시작했어요. 우리 친구들이 대학에 다닌 경험이 없으니 이왕이면 대학에서 교양 수업하듯이 했죠.”

‘친구들’은 윙의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그 인문학 프로그램이 발전해 지식공동체 수유너머와 함께 하는 인문학 팩토리 길이라는 연구소가 됐다. 인문학 속으로 들어가 또다시 받아 안은 숙제는 다름아닌 몸이었다, 무거운 몸.

-몸이 무겁다는 게 무슨 뜻이지요?

“트라우마 때문이죠. 그런데 그것을 정신의 문제로만 보고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우울증 치료약을 먹는 게 정말 답일까, 이 문제를 어떻게 돌파할까 고민했어요. 그때 공부한 게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이죠. 육체가 능동적이면 정신도 그렇게 된다, 그러니 몸을 능동적으로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주 금요일 윙의 친구들과 모두 함께 관악산을 오르는 등산을 시작했어요. 저는 한번 시작하면 5년은 기본인데, 등산도 10년을 했죠.”

지독한 꾸준함이다. 하기는 그 정도를 해야 변화가 시작될 테니.

“등산을 해보니 친구들의 지난 일주일의 삶이 보이더라고요. 등산을 하는데 늦게 일어나고 몸이 무겁고 하면 영락없이 지난 주를 엉망으로 산 거죠. 가볍게 잘 올라가면 규칙적으로 잘 산 거예요.”

-또 느낀 게 있나요.

“밥이에요.”

-밥이요?

“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니까 몸으로 모든 걸 해봤거든요. 그 중 하나가 밥을 해보는 거였어요. 당시에는 쉼터에 취사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인문학을 같이 공부하던 연구자들이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언제까지 한 사람의 노동에 의존해 밥을 먹을 거냐’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마침 그 때쯤 취사원이 그만둘 일이 생기기도 했고요. 그럼 우리끼리 밥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제가 주방 매니저를 했죠. 일주일치 식단을 짜고 장을 보고 당번을 짜고 이런 일들을 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치우는 규칙도 생겼죠.”

-밥을 다 함께 해먹고 나니 달라진 게 있나요?

“엄청났죠. 일단 우리 친구들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한눈에 알게 됐어요. 대개 아주 자극적인 맛을 즐기더라고요. 내가 먹는 게 곧 나를 나타낸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더 좋은 재료로 담백한 맛을 내서 요리하려고 했죠. 무척 풍요로운 시간이었어요. 그때 제 마음은 엄마의 밥상이었죠.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어요. 누군가를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요. 그건 자기가 주도적으로 삶을 산다는 것과도 연결되죠.”

◇처음엔 ‘사장님’ 만드는 게 목표
그와 마주한 카페 곁애는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카페로도 유명하다. 탁자 위에 냅킨 대신 천으로 만든 작은 수건이 놓여있다. 이한호 기자
-자활지원 사업은 언제부터 했나요?

“2007년부터 센터를 열었어요. 그 전부터 있던 쉼터도 정원이 35명 정도로 꽤 컸는데 해마다 인원수를 5명씩 줄여나갔어요. 성인 여성 수십 명이 한 쉼터에서 생활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래서 쉼터 인원을 10명으로 줄인 뒤 자활지원센터를 열었죠. 2012년즈음 쉼터는 아예 정리했어요.”

-자활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가진 목표가 있나요?

“우리가 직접 일을 해 보자는 거였어요. 피부관리나 바리스타도 자격증을 따서 바로 실전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죠. 또 다행히 법인 건물이 있으니 이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사업장) 시도가 가능했어요. 2000년대 초반까지 저는 탈성매매 여성도 ‘사장님’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단 하나라도 성공사례를 만들어야겠다고요. 그래서 실제 피부관리숍도 열어서 사장을 만들었죠! 당시 지원을 해주던 여성부(현 여성가족부)의 담당 국장이 오픈 행사에 와서 감격해 눈물을 흘렸어요. 장사도 정말 잘 됐죠. 그런데 2년도 하지 못했어요. 당시 사장이던 친구가 결혼을 해야 하니 그만두겠다고 해서 제가 울면서 말렸어요. 애도 내가 키워줄 테니 일은 계속 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결국 떠났죠. 숍은 그래도 다른 사람이 할 수는 있지만 다시 못하겠더라고요.”

다 쏟아부었기에 온 허무함일 테다.

“이제는 여러 외부 변수가 미치는 영향을 줄이도록 시스템을 만들자 싶었죠. 그래서 이 건물 1층에 ‘신길동 그 가게’란 카페를 열었어요. 동네마다 지점을 내리라 야심을 품고요. 하하. 정말 즐겁게 장사했어요. 2년 만에 자력으로 지점을 냈죠. ‘상수동 그 가게’라고. 그런데 그 지점이 잘 안됐어요. 생각해 보니 우리 친구들이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카페는 문화를 파는 곳이잖아요. 아차 싶었어요.”

이것 말고도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조잘조잘 분식&카페’, 덮밥을 파는 ‘오덮밥’ 같은 시도를 했다. 그 것뿐인가. 커피 로스팅, 목공작업장, 핸드메이드 제품 제작처럼 몸을 움직여 하는 일도 했다. 여기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로부터 서울 상도동의 빌라 한 채를 장기 임대 계약해 만든 셰어하우스 ‘상도동 우리집’을 운영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한 사업이 정말 다양한데, 이유가 있나요?

“정답이란 게 없으니까요. 우리 친구들에게 먹고 사는 일이 돼야 하니까 한두 가지로는 안됐죠. 보통 사람이 꾸준한 성실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길이었어요. 예를 들면, 손 작업이 치유의 효과가 있으니 핸드메이드를 시작했다가 종류를 바꿔가고 또 천연염색도 해보니 한 가지를 하더라도 완성도 있게 만드는 게 좋겠다 해서 쪽 염색(쪽잎을 이용한 짙은 푸른 빛의 염색)만 하고 있고요. 목공도 하면서 ‘여자들의 책상’이라고 자기 만의 방까지는 아니지만, 자기 만의 책상을 갖는 캠페인도 벌였죠. 사진과 영상 작업도 했어요. 우리 친구들이 자기 얘기를 찍은 거죠. 그 작품들로 영상워크숍도 하고 번듯한 상영관에서 여성인권영상제도 했어요. 아예 미디어센터를 만들어서 영상 제작을 하면서 돈도 벌었죠.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 도전들을 하며 얼마나 많이 터덕거리고 넘어졌을까.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립, 혼밥도 정성스레 차릴 줄 아는 것
그는 소녀처럼 곧잘 까르르 웃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서 전쟁 같은 세월을 살아낸 단단함이 엿보였다. 이한호 기자
-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립하는 데 가장 힘들어 하는 게 뭔가요.

“처음에는 저도 ‘어린 나이에 왜 저렇게 의지가 없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가 정의한 자활이고 자립이더라고요. 제 역할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헤쳐나가는 데 옆에서 지켜봐 주고 지지해 주는 거더라고요. 처음에는 저도 자립은 곧 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자립한다는 건 곧 삶이에요. 살아가는 거죠. 그건 자격증이나 졸업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혼자 먹는 밥상도 정성스럽게 차릴 줄 알고,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도 알고, 그런 삶의 굽이굽이에서 희로애락을 충분히 느끼는 일이죠. 그런데 하면 할수록 어렵더라고요. 예전에는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하고 채찍질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밥해 주는 사람으로 제 역할을 상정했어요.”

그가 센터장 자리도 넘기고 그저 법인 대표로 남은 이유다.

-밥이 뭐기에 그런가요.

“따뜻한 밥 한 끼만 해 줘도 그게 전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는 상담실에서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위계를 가지고 피해 얘기를 끄집어 내려고 신경전도 벌이고 그런 적도 있어요. 그런데 밥 한 끼에 스르르 그런 속 얘기가 다 나오고는 환해진 얼굴로 돌아가더라고요.”

지금은 대상을 넓혀, 그저 푸근하게 밥상을 차리고 싶은 이들을 비덕살롱으로 초대해 대접하기도 한다.

-윙으로 찾아오는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 데 원칙이 있나요.

“윙에는 세 가지 윤리가 있어요. 첫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개 불화는 자기가 먹은 것, 머문 자리를 치우지 않는 데서 시작되더라고요. 둘째, 약속을 잘 지킨다. 셋째는 핑계대지 않는다. 회의를 오후 3시에 하기로 하면 딱 정시에 시작해요. 늦었다면 변명하지 말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죠. 사람들이 윙의 친구들이 어떤 걸 배워서 나가면 좋겠냐고 종종 묻거든요. 친구들이 상대방 눈을 마주치면서 이 세 마디를 할 수 있으면 정말 잘 살겠다 싶어요.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예요. 이걸 ‘안미고’라고 이름 붙여서 세뇌될 정도로 강조를 하죠.”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니 그런 거군요.

“맞아요.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여기서 배우면 좋겠어요. 윙에 오는 많은 친구들이 삶을 자신의 다리로 딛고 사는 게 아니라 부유하듯 살아요. 그래서 사소하게 치부되는 것들이 삶에서 정말 소중하고 위대하다는 걸 체험으로 느끼게 하고 싶죠. 저는 헛된 희망을 주는 걸 경계해요. 예를 들어 ‘지금만 참으면 돼, 힘내, 좋은 시간이 올 거야’ 같은. 시간이 지나도 삶은 잘 안 바뀌거든요. 그러니 그간 치열한 전쟁 같았어요. 자신의 삶과 싸워야 하니까. 그것은 관성과의 싸움이죠. 그 친구들에게 ‘이런 삶도 있어’라고 보여주고 따라오게 하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윙의 여성들에게 일이란 뭘까요.

“저는 일은 삶의 척추라고 생각해요. 일없는 삶에는 시혜와 동정이 들어차죠. 윙도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했지만, 그건 한시적이라고 생각해요. 선물이죠. 그러니 그 선물을 되돌려 줘야 해요. 그건 바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죠. 이곳에는 아프고 힘들고 열악한 처지의 여성들이 와요. 트라우마로 일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요. 그러니 설거지 같은 작은 일도 이들에게는 도전이 될 수 있죠.”

그의 눈에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과거는 눈물이 되어 두 뺨에 떨어졌다.

◇얽히고설켜 자라는 넝쿨 같은 삶으로
그는 어릴 적 할머니가 하시던 은성원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부터 ‘언니들’과 어울려 사는 삶이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가 빛바랜 은성원 시절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한호 기자
-윙의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자활지원센터는 사회복지기관이니 서울시와 여성가족부로부터 절반씩 지원을 받고 있어요. 센터에서는 천연염색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인디고 핸즈’ 같은 수익사업도 하죠. 카페 곁애나 비덕살롱은 독립적으로 운영해요. 비덕살롱에서 원테이블 레스토랑과 케이터링을 겸하니 또 수익이 나고요. 쉼터로 쓰던 공간은 여성단체에 임대했어요. 그리고 100명 정도 되는 후원회원들이 있어요. 상도동 우리집 입주자들에게서 사용료를 받지만 셰어하우스의 운영비로 쓰고 있죠. 자체 수익을 늘려서 국고보조의 비율을 점차 줄이고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국고보조를 반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자생할 수 있으니까요.”

-윙의 여성들을 친구라고 부르던데요.

“맞아요.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존댓말을 써요. 이곳에 오는 여성들은 대개 외부에서 막말, 하대를 당한 경험이 많아요. 여기서는 모두 일하는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부를 때도 ‘정은아’가 아니라 ‘정은’이라고 하죠. 스태프면 ‘정은 스태프’하는 식으로 부르고요. 저도 윙의 여성들을 통칭할 때 ‘친구’라는 말을 쓰죠. 존엄한 일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자활지원센터의 이름이 넝쿨인데 무슨 뜻으로 지었나요.

“원래는 센터의 이름도 (법인명과 같은) 윙이었는데, 최근 바꿨어요. 생각의 변화가 담겨 있죠. 예전에는 ‘여성성공센터 윙’이었어요. 성공이 중요하다고 여겼죠. 여성이 주도권을 쥔 삶이요. 그런데 지금은 혼자 잘나서 사는 게 아니라, 얽히고설키고 비비기도 하면서 함께 힘을 합해 올라가는 게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넝쿨로 바꿨어요.”

-결혼도 했고, 자녀도 둘이나 있는데 어떻게 병행했나요.

“(일과 가정의) 구분이 없었죠. 둘째는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돼서 데리고 출근했어요. (미소) 큰애도 마찬가지죠. 집도 5분 거리에 있어요. 그러니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죠. 아이를 놀이방에서 데려와서 씻기고 밥 먹이고 재워두고 다시 나와서 일하곤 했어요.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했네요. 다행히 일하는 게 즐겁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어요. 열정도 있었고요. 그러니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죠.”

-들어보면 무척 힘든 일이었는데, 그걸 힘든 줄 모르고 하셨군요.

“저는 제 눈으로 사람들이 변하는 걸 확인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껴요. 재미있지요. 관념적으로 추론하는 것보다 몸으로 부딪혀서 느끼고 감흥하는 쪽이에요. 사람이란 존재자체가 너무나 무궁무진하니 지치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 감사하게도 건강해요. 그리고 긍정적이고요. 물론 힘든 때나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었죠. 그런 때는 밥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어요.”

-보람을 느낀 순간도 많았겠죠.

“순간순간 느껴요. 눈을 보면 알죠. 올해 윙에 있던 친구 한 명이 결혼을 해서 갔는데 신부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쉼터 친구들도 많이 왔고요. 한 친구의 아이가 ‘엄마, 저 아줌마는 누구야’하는데 ‘엄마 선생님이야’라고 답해 주더라고요. ‘내가 너희들에게 선생님이구나’ 싶어서….”

또다시 그가 눈물을 흘렸다.

◇전쟁 같았지만 행복했다
윙의 건물 1층에는 카페 ‘곁애’가, 그 옆엔 ‘비덕살롱’이 있다. 비덕살롱에는 그가 마음을 담아 차리는 치유의 식탁이 있다. 이한호 기자
-만족스럽고 행복한 듯해요.

“맞아요. 올해 들어 더욱 그래요. 최근 2, 3년은 좀 힘들었거든요. 몸도, 열정도 예전 같지 않고요. 22년 간 쉬지 않고 해왔으니까요. 실무를 정리해야겠다 싶었죠. 그러면 앞으로 이 안에서 무엇으로 기여를 할까 생각하다가 비덕살롱을 시작한 거예요. 지금은 무척 재미있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요.

“저는 진짜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인가 계속 물어오며 살았어요. 앞으로도 제 안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 피상적인 만남이나 겉치레 같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죠. 대신 내가 더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잘하고 싶어요.”

그는 웃음도, 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내 앞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을 뿐인데 마치 여러 인생을 만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가 비빌 언덕이 되어 준 수많은 인생들이 녹아 있어 그럴 것이다. 그의 삶은 돌고 돌아, 다시 밥상 앞으로 왔다. 욕망도, 눈물도, 화도, 고마움도, 기쁨도 한데 섞여 깊고 다정한 맛을 낼 그의 밥상이 늘 도란도란하기를.

윙의 윤리는 오랜 세월에 걸친 생활의 지혜가 담긴 원칙이다. 그것은 공동체 생활의 기초다. 윙의 윤리를 새긴 나무판 옆에서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한호 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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