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부터 영화까지 논란 이어진 ‘김지영’ 이야기
영화관 찾은 남성은 “페미니즘 영화 아니더라”
개봉 3주차를 맞아 관객 수 320만명을 돌파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어느덧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나이와 상황을 불문하고 여성들은 “우리의 얘기”라고 공감한 데 비해, 일부 남성들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피해망상에 불과하다”며 반감을 드러낸 것 역시 ‘김지영 현상’의 단면입니다.
온라인에서 쏟아진 평점 테러나 배우들을 향한 악플 세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손익 분기점을 넘기며 순항하고 있습니다. CGV 기준 이 영화의 남성 예매자 비율은 24%(네이버는 28%)인데요,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성들로부터 ‘외면 받았다’고 할 순 없는 숫자죠. 실제로 11일 오후 서울 명동 한 극장의 82년생 김지영 상영관에는 20여명의 남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상영이 끝나고, 극장을 찾은 남성들에게 “왜 82년생 김지영을 보게 됐나” 물었습니다. 1982년 4월 1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에서 키 50㎝, 몸무게 2.9㎏으로 태어나 지금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을 둔 30대 전업주부의 삶을 다룬 새롭지도, 파격적이지도 않은 이 영화를 말이죠.
◇연인과 누나, 딸의 손에 이끌려 만난 ‘김지영’
연인과 함께 이날 82년생 김지영을 관람한 김재호(24)씨는 “여자친구가 ‘꼭 봐야 한다’고 해서 보러 왔다”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실제로 이날 영화관을 찾은 남성들은 거의 여성과 함께였는데요, 연인들을 위한 ‘커플석’은 꽉 찼을 정도였습니다.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대학 동기인 이성친구와 영화를 보러 온 윤모(22)씨도 “친구와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마침 시간대가 맞아 82년생 김지영을 보게 된 것”이라며 “(영화를) 보기 전에 거부감은 딱히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가족의 권유로 극장을 찾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날 홀로 영화를 본 유일한 남성이었던 전모(29)씨는 “누나가 예매해줘서 보러 왔다”고 전했는데요, 그는 “사실 누나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 영화를 고르진 않았을 것”이라면서도 “평소에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긴 했다”고 덧붙였어요.
최근 이 영화를 봤다는 민승윤(58)씨는 “큰 딸이 가자고 해서 부인, 딸들과 다같이 관람했다”고 했습니다. 두 딸의 아버지인 그는 “사실 오기 전에 딸이 대강 말해주긴 했지만, 사회적으로 말이 많은 영화인진 잘 몰랐다”며 “(가족들에게) 무심했던 것도 생각나고, 좀 그렇더라”고 말을 흐렸습니다.
◇”어머니 생각나” “페미니즘 영화 아니던데”
그렇다면 영화를 본 남성들의 ‘감상평’은 어땠을까요. 이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이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엄마로 등장하는 김지영은 물론이고 지영의 어머니, 시어머니, 할머니 등을 통해 당연하고 평범하게만 여겨왔던 어머니의 삶이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는 것이죠. 민승윤씨는 “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가 자식들 때문에 고생하신 게 생각나 울컥했고, 애들을 혼자 키우다시피 한 부인한테도 미안하더라”고 전했어요.
배상현(40)씨는 이 영화를 가리켜 “페미니즘적 시각을 담은 영화라기보단 단순한 드라마”라고 했는데요, 모든 영화가 그렇듯 감독이 초점을 맞춘 한 인물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누구의 삶을 일반화해서 그렸다기보다는 개인의 삶이고, 공감 여부 역시 개인에게 달려있는 것”이라면서 “저는 비슷한 80년대생이라 가볍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했어요.
영화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봤다는 이들의 목소리도 이어졌습니다. 직장인 하상훈(31)씨는 “평소 여자친구와 페미니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 편인데도, 영화관을 채운 대부분의 여성 관객이 울음을 터뜨릴 때 도무지 울음이 나지 않았다”며 “여자들의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이 다른 곳이었단 걸 느꼈다”고 했어요. 김재호씨도 “이제 남녀가 똑같이 일하는 세상인데, 앞으로의 결혼과 육아 등에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되짚어봤다”고 털어놨습니다.
◇’갈등의 상징’에서 이해의 가교로
개봉 전부터 온라인을 통한 반발이 조명되며 ‘젠더 갈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정작 영화를 본 남성들은 “갈등을 부추기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네이버에서 남성 누리꾼이 82년생 김지영 영화에 준 평점은 2.8점에 불과하지만 ‘관람객’, 즉 실제로 이 영화를 본 남성들은 8.89점을 매기기도 했어요. 여성 관람객의 평점(9.45)과 큰 차이가 없었죠. 대학원생 이선준(29)씨는 “남성을 가해자로 몰아간다거나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여성만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영화”라고 평가했어요.
물론 영화, 그리고 김지영으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부부싸움의 발단이 됐다거나, 이 영화의 관람 여부로 이성을 가른다는 이들도 있어요. “너만 힘드냐”는 면박과 함께 거듭 부풀어오르는 논란은 때로는 너무나 막연해서 도저히 손댈 수 없는 문제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는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가는 남자들이 꽤 있고, 영화를 보고 공감했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상당히 있다는 점은 이전과 다른 지점”이라고 들었습니다. 영화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일정 부분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김지영과 남편인 대현을 비롯해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하고픈 거 다 해”가며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을, 어쩌면 우리는 이미 조금씩 내디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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