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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노벰버 엘레지

입력
2019.11.13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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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비움이자 떠남이면서, 또 다른 채움이자 영접이다. 비움과 채움은 자연과 삶의 이치다.
11월은 비움이자 떠남이면서, 또 다른 채움이자 영접이다. 비움과 채움은 자연과 삶의 이치다.

11월도 벌써 반쯤 지나고 있다. 11월은 왠지 안쓰럽고 애처로운 달이다.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푸대접을 받는 달이 아닐까 싶다. 10월처럼 들뜨거나 화려하지도 못하고, 12월처럼 부산하거나 유의미하지도 않다. 토ᆞ일 빼고는 노는 날마저 없는, 내세울 것이 없는 그저 30일짜리 달이다. 직장이나 단체의 행사나 결혼식도 거의 없다. 돈 쓸 일도 별로 없는 달이다. 한 해의 하이라이트로 이어주는 징검다리나 인터체인지 같은, 통과의례적 달이다.

숫자 ‘11’은 묘하다. ‘1’은 홀로 빼어나 외로운 형상이다. 그 ‘1’이 나란히 서있다. 빈 가지만 남은 두 그루 나무 같기도 하고, 쓸쓸해서 마주 앉았지만 영원히 합하지 못하는 두 남녀 같기도 하다. 홀수 두 개의 합은 짝수가 아니었다.

누구나 가장 좋아하는 달이 있다. 11월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만추와 초겨울은 단 며칠 사이다. 11월 초입까지만 해도 산야는 절정이다. 하지만 한번 비 내리고 잎이 지기 시작하면 천지는 곧바로 음산하고 음울하고 황량한 기운에 잠긴다. ‘숙살(肅殺)’이라고 했다. 국어사전에는 ‘초목을 말려 죽이는 쌀쌀하고 냉랭한 가을 기운’이라고 돼있다.

감나무에 까치밥 하나가 애절하게 매달려 있다. 고추잠자리는 느릿느릿 난다. 허수아비는 늙어간다. 들판은 습기가 빠져나가 바스락거리는 것들로 가득하다. 햇살은 여위어 긴 그림자를 끌고 간다. 지하철 출입구를 빠져 나온 사람들이 총총히 제 갈 길로 가고 있다. 욕망은 증발했다. 영혼은 소진됐다. 일신은 적막하다. 삶은 남루하다. 그 11월을 서늘하게 견뎌내고 있다.

시인은 그런 11월을 좋아한다. 아마도 5월보다 11월을 노래한 시가 많다.

나태주는 ‘내가 사랑하는 계절’에서 11월을 제일로 좋아한다고 했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한다”고 헌사했다. 황지우는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했고(‘11월의 나무’), 도종환은 “가장 아름다운 건 이 무렵이다…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다”고 노래했다(‘11월의 나무’). 김용택에게 11월은 “아무런 까닭 없이/남은 생과 하물며/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진 계절”이다(‘이 하찮은 가치’).

11월은 비움이자 떠남이면서, 또 다른 채움이자 영접이다. 비움과 채움은 자연과 삶의 이치다.
11월은 비움이자 떠남이면서, 또 다른 채움이자 영접이다. 비움과 채움은 자연과 삶의 이치다.

11월은 떠나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이해인 수녀는 “두고 갈 것도 없고/가져갈 것도 없는/가벼운 충만함이여//헛되고 헛된 욕심이/나를 다시 휘감기 전/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라고 기도했다(‘11월의 마지막 기도’). 이외수는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바람은 어디로 가자고/내 등을 떠미는가” 탄식했다(‘11월’). 다시 나태주에겐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11월’)이다.

나는 젊은 날 미팅을 할 때 여자가 “어느 계절을 제일 좋아하세요” 물으면 “6월의 이른 새벽과 11월의 늦은 저녁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의례적 질문에 일격을 가하는 깜찍하고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계절이 선명하지 않은 환절기가 좋았다. 애매한 환절기는 뼈마디를 욱신거리게 한다. 몸속에, 마음속에 무언가가 기어다니는 거 같다. 좋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그래서 버리고 삼가고 생각하고 독해져야 할 거 같았다. 싸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11월이 아직 완강한 태세로 버티고 있다. 시인들의 11월을 훔쳐보니 그래도 힘이 난다. 그래, 나 언제 혼자 아닌 적이 있었던가.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거늘. 더 해서 무엇 하며 덜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사랑은 더 해서 무엇 하며, 술은 덜 마셔서 무엇 하리. 머잖아 첫눈은 내릴 테니. 당분간 더 속수무책으로 고독하리라.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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