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배우 윤정희의 알츠하이머병 투병 뉴스를 접하고 헛헛한 마음에 9년전 기자수첩을 꺼냈다.
2010년 이미 60대 중반이었던 그는 당시를 기준으로 16년만의 스크린 복귀작 ‘시’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쉼 없이 달려갈 미래를 자신했다. 연출자인 이창동 감독을 만나고 새롭게 태어나 ‘제2의 데뷔’를 한 기분이라며 “어렵게 공백을 이겨냈으니, 앞으론 좋은 작품에 계속 출연할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프랑스 칸에서 재회했다. 제63회 칸 국제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 공식 진출작의 주연 자격으로 현지를 찾아, 유창한 프랑스어와 기품있는 자태로 프랑스 영화 관계자들과 취재진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마저 어깨가 으쓱거릴 정도였다.
세련된 매너는 ‘시’에서의 놀라운 호연에 날개를 달아줬다. 영화제 막판,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떠올랐던 배경이기도 했다. 한국 취재진은 폐막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조금 아쉬웠다. 그해 영화제 공식 포스터 주인공이었던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에게 상을 내주고 이창동 감독의 각본상 수상을 거드는데 그쳤다.
그러나 기간 내내 본인도 유명 피아니스트인 남편 백건우가 기꺼이 매니저를 자처하며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돕는 모습까지, 이들 내외가 영화제 안팎에서 보여준 태도와 금슬은 관계자들과 국내외 취재진 등 모두에게 수상 이상으로 깊은 감동을 남겨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신작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앞서 윤정희의 다짐과 달랐다. 연주회를 위해 내한한 남편과 동행했을 때만 간간이 근황이 공개됐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이 조금 안 좋아졌나 싶었을 뿐,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을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작품이 돼 버린 ‘시’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캐릭터를 연기했던 걸 떠올리면 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다. 특히나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가운데 한 명인 그가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소식에 따르면 윤정희는 이젠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외동딸에게 “오늘 현장은 몇 시까지 가야 하지?”라며 촬영 일정을 물어본다고 한다. 머릿속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는 와중에도 힌국 영화계를 호령했던 배우로서의 기억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단 얘기 아닐까. 영화속 드라마틱한 극적 반전과도 같은 쾌유를 기대할 수만 있어도 좋으련만…그 기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간직하길 빈다.
P.S 알츠하이머병을 핑계로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 출석을 거부하고 있는 누군가가 여유롭게 골프를 즐기는 장면이 최근 포착됐다. 포착 당시 누군가는 타수까지 또렷하게 기억해 알츠하이머병 환자란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문제가 되자 측근은 “골프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자신이) 골프를 친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는데…만약 발병이 사실이라면 윤정희와 이유는 전혀 다르지만 기적 같은 쾌유로 재판에 출석하길 바란다.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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