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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앤드루 양이 8일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 즉, 예비선거 후보에 이름을 올려 달라고 요청한 뒤 웃고 있다. 콩코드=AP 연합뉴스

얼마 전 초등학교 1학년 조카가 숙제 하라는 제 엄마의 말에 “아무리 공부해도 커서 아빠만큼 살기도 힘들 걸?”이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참 웃었다. 어른 같은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열심히 살아도 이전 세대보다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요즘 세태를 확인하는 듯해 걱정스럽기도 했다.

사실 지금 지구촌 곳곳은 평범한 삶을 위협받는 사람들의 아우성이다. 칠레에선 지하철 요금 인상에, 레바논에서는 스마트폰 메신저에 대한 세금 부과 계획에 폭발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에서도 불공정과 불평등에 분노한 사람들의 거리 집회가 두 달여간 이어졌다.

미국 대선(2020년 11월 3일)을 1년여 앞두고 경선이 한창인 민주당의 변방 후보 앤드루 양에게 눈길이 가는 것도 그래서다. 대만계 미국인이자 변호사 출신 기업가인 그는 노련한 정치인 후보에 비해 인지도가 현저히 낮고, 18세 이상 성인에게 월 1,000달러씩 기본소득을 제공하겠다는 급진적 공약 ‘자유배당금’을 내걸어 당선 유력군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양갱(Yang Gang)’으로 불리는 열성적 지지자들이 꾸준히 늘면서 뉴욕타임스 등 주요 매체들도 지지율 3%에 불과한 그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양의 선거 캠페인은 자칭 ‘인간 중심의 자본주의’다. 그는 출마의 변을 밝힌 책 ‘보통 사람들의 전쟁(The War on Normal People)’에서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기술 대기업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기는 미국 내 70%에 이르는 ‘보통 사람들’을 대량 실업으로 내몰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무인자동차 도입으로 미 전역의 350만명에 이르는 화물차 기사는 물론 그들이 이용하는 모텔과 화물차 휴게소 등 연관 산업 종사자 720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본소득 공약도 교육과 훈련만으로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이 같은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양의 진단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대형마트 계산원은 빠른 속도로 무인계산대로 대체되고 있다. ‘혁신‘이라는 절대선의 명분을 앞세운 플랫폼 기반 업체가 창출하는 일자리는 기존 일자리를 파괴할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자동화와 일자리 상실로 인한 보통 사람들의 위기가 미래의 암울한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고 강조하는 명쾌한 진단이 양의 인기 비결이다. 경제적 절망감이 혐오와 불안 등 공동체 파괴로 이어진다고 믿는 그는 서둘러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양은 그래서 정치 경험이 전무한데도 지방선거나 주지사 선거 등을 거치지 않고 곧장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노태우 군사 정권이 ‘보통 사람’이란 기만적 선거 구호를 내걸고 대선에서 승리한 게 벌써 32년 전이건만 그 대척점에 섰던 이들이 세운 현 정부에서조차 보통 사람이 살만한 환경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후반기 첫날인 10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강조한 정책 목표라는 것도 결국 “밥 먹고, 공부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는 국민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공허한 모토 대신 구체적 진단과 대안을 역설하는 앤드루 양의 출현이 반갑다. 동시에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말마따나 “좀비에 물린 것 같이” 보통 사람들이 고통 받는 동안 정쟁에만 매달리는 한국 정치가 요즘 들어 유난히 보기 싫다.

양은 기본소득 공약에 대해 ‘일하려는 의욕을 꺾을 것’이라거나 ‘무상으로 받은 돈이니 엉뚱한 곳에 쓰일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한결같이 “인간을 믿는다”고 반박한다.

어쩌면 양의 인기는 월 1,000달러의 기본소득 공약도, 현란한 지표 제시도 아닌, 이 시대 보통 사람이 직면한 고통에 공감한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일지 모른다.

김소연 국제부 차장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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