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각 부위와 손, 발, 몸체의 생김새 및 골격, 색깔 등을 근거로 개인의 길흉과 운명을 판단하는 점법을 관상술(법)이라 하고, 용모가 운명과 직결된다고 믿는 가치관 혹은 사상을 관상학이라 부른다. 관상학을 광의의 인문학 속에 포함시키는 이들도 있지만, 점성술이나 종말론처럼 그 자체를 하나의 인문적 현상으로 판단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관상학의 근거나 통계적 유의미성은 검증된 바 없다.
동양의 경우 관상학의 뿌리는 중국 주나라 대까지 거슬러 오른다고 할 만큼 깊고 지금도 맹신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끈질기다. 당서(唐書)에 나온다는 당나라 관리 등용 기준인 신언서판(身言書判), 즉 인물과 언변, 서체, 판단력의 처음도 ‘인물’, 의젓한 풍채와 반듯한 용모에 바른 영혼이 깃든다는 믿음이었다. 근년에는 육체적 건강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의미로 유사한 표현이 쓰일 때도 있지만, 차별적 요소는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관상은 미신이고 편견이다.
하지만 외모가 사회생활 전반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다. 대중적 지지가 생명인 대중 정치인에게 외모 자산은, 연예인 못지않게 중요하고, 변호사나 MBA 졸업생들의 연봉도 외모와 무관하지 않으며, TV에 출연한 기업 CEO의 외모에 따라 해당 기업의 주가가 영향을 받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부하는 만큼 그리 이성적인 존재가 못 된다.
그 점에선 서양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그 뿌리는 기독교 사상 즉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신은 무결하게 반듯하고 아름다운 존재여서, 그 형상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영혼도 신성에 가까우리라는 편견이 외모 차별 이데올로기의 기초를 이뤘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관상학을 정초한 이는 18세기 스위스의 개신교 목사 겸 신비주의 신학자 요하나 카스퍼 라바터(Jo-hana K. Lavater, 1741.11.15~1801.1.2)다. 그는 1775~78년에 걸쳐 발표한 ‘인간의 지혜와 선을 평가하는 관상학적 요소들’이란 일련의 글로 유럽 전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미덕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악덕은 추악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아름다운 사람은 미덕을 갖춘 사람이란 명제도 그렇게 성립한다. 21세기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전근대의 적폐 중 하나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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