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산문집을 낸 이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가 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 글쓰기 강의를 몇 차례 한 뒤에도 깨달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나 홀로 뭔가를 설명하거나 길게 이야기를 하는 일은 적성에 안 맞는다. 물론 능력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그런 상황이 그다지 즐겁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북토크라는 행사를 치르고 나면 말이 너무 빠르다는 지적이 늘 따라온다. 긴장한 탓이라고 변명하곤 하는데, 최근에 뜻밖의 평을 하나 더 들었다.
“말을 할 때 작가다운 태도가 전혀 없어요. 그래서 더 편안하기는 하지만.”
잠시 어리둥절하여 작가다운 태도가 무엇이냐고 되묻자, 당신의 언행 같지 않은 태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무슨 순환논증이란 말인가. 그 말의 구체적 의미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밤늦게 혼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작가다운 태도란 무엇일까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그날 내가 했던 말을 곰곰 복기해 보았다. 소설 쓰는 일과 칼럼 쓰는 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다는 것. 내가 쓰는 칼럼은 가벼운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을 그림이라고 한다면 에세이는 사진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 프레임과 조명, 시선의 각도를 조절할 수는 있지만, 원본을 변형할 수는 없다는 것. 그러고 나서 기왕 사진이라는 비유를 쓴 김에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개념을 빌려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설명했다.
잘 찍은 사진은 대부분 ‘스투디움’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관심이나 정서를 느낀다. 도덕적 정치적 합리성과 교양에 근거하는 감동이며, 바르트의 글을 인용하자면,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에 속한다. 그것은 반쯤의 욕망, 반쯤의 의지를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광경들, 옷들, 책들에 대해 느끼는, 잔잔하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이러한 ‘스투디움’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나타나는 것이 ‘푼크툼’이다. 라틴어로 마침표라는 의미인 그것을 바르트는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고 완력을 휘둘러 잡아당기는 우연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 감동이 아니라 개인적 사로잡힘에 가깝다. 나는 청중들에게 산동네의 허름한 벽을 배경으로 빨랫줄에 널려 있는 빨래들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낡은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사이에 노란색 수건이 하나 걸려 있고, 수건에는 ‘94 수련회 기념’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다. 잘 찍은 사진이었으므로, 나는 당연히 빈곤, 불평등, 재개발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며 막연한 슬픔이나 분노, 안타까움에 잠긴다. 하지만 시선이 노란 수건에 찍혀 있는 파란 글자들과 만나는 순간, 94년 여름의 기억 속 어떤 정서가 나를 소환한다. 사진의 ‘스투디움’에 균열이 일어난다. 사진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우연의 힘일 것이다.
새로운 데이터, 예리한 분석력도 없어서 시의성 강한 논리적 글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사람들이 ‘푼크툼’을 경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면적이고 지루한 매체인 글이 홀연 찢어져 공간을 만들고 확장되길 바란다. 물론 의도와 계산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느슨한 논리나 무의식 혹은 직관을 따라 산만하게 흘러가는 글 속에 ‘그것’이 숨어 있을 확률이 높으리라 믿을 뿐.
그날 밤의 고민은 작가다운 태도란 일종의 ‘스투디움’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간단히 추론할 수 있다시피, ‘푼크툼’은 ‘스투디움’이라는 전제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평소처럼 쉽게 정신승리에 이르지 못했다. 내 것이 아닌 개념을 동행으로 삼은 탓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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