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상> 마침표 찍지 못한 독일 통일
칼렌바흐 前 유럽의회 의원 “성 니콜라이 교회 기도회로 시작, 그땐 통일 상상 못해”
1989년 시작된 '동독 월요 시위'의 핵심 활동가 중 한 명이었던 기젤라 칼렌바흐(75) 전 유럽의회 의원이 7일 시위의 발원지였던 라이프치히의 한 카페에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동독 월요 시위는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라이프치히=최나실 기자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인권과 자유, 환경보호를 외쳤던 기젤라 칼렌바흐(75) 전 유럽의회 의원은 7일(현지시간) 과거 동독지역의 주요 도시였던 라이프치히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를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장벽 붕괴 30주년인 올해는 동독 체제를 무너뜨린 평화혁명 30주년이기도 하다. 칼렌바흐 전 의원은 그 변화를 만들어낸 ‘동독 월요 시위’ 한복판에 섰던 활동가 중 한 명이다.

동독 체제에서 결사의 자유는 꿈꿀 수도 없었지만 그나마 자율성이 허용된 교회는 반체제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이자, 정치적 비판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특히 평화혁명의 시발점인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이미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평화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교회 모임은) 사람들에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도록 독려할 기회였다”고 칼렌바흐 전 의원은 말했다.

그러던 1989년 9월 4일 사람들은 여느 때와는 달리 평화기도회 이후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1,200명에 이르렀고, 한 달 여 뒤 10월 9일에는 7만명으로 불어났다. 끝이 아니었다. 이후 거리에는 매주 수십만 명의 인파가 평화를 갈구하며 집결했다. 사실 이미 5월 7일 지방선거 조작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커진 데다, 그해 여름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으로 동독 주민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동독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다.

교회와 함께 시위대의 다른 중요한 축을 맡은 건 ‘이주 희망자’들이었다. 당시 동독을 말 그대로 ‘탈출’한 이들도 많았지만, 합법적 이주 신청도 가능했다. 칼렌바흐 전 의원은 “이들에게는 강력한 억압이 있었다. 실직되거나, 자산을 강제로 팔아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주 허가가 결정될 때까지 수개월, 수년이 걸렸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는 점차 동독 전역으로 번져갔고, 여행 자유와 부정선거 규탄을 외치던 시위대의 목소리는 ‘슈타지 해체’ 등 강력한 개혁 요구로 발전해갔다. 다만 ‘통일’이 처음 손꼽혔던 미래는 아니었다. 칼렌바흐 전 의원은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말하기 위해 교회 지붕 아래 모였을 때 통일을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많은 반체제 인사들은 동독의 독자적인 민주주의 개혁과 발전을 바랐다.

그러나 11월 9일 동서독 국경이 열리자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고, 결국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됐다. 평화적 수단을 통한 공산주의와 냉전 체제의 붕괴였고, 동시에 동독 주민들에게는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교회 안에 은밀하게 환경 문제를 고민하던 칼렌바흐도 1990년부터 녹색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해, 제6대 유럽의회에서 독일의 ‘동맹90/녹색당’ 소속 의원으로서 환경 보호 운동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독일)=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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