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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병력 우위 북부군 막아선‘일당백 복병’은 사제폭탄

입력
2019.11.09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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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미국 남북전쟁 요크타운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인 1862년 버지니아반도와 그 양안의 요크강ㆍ제임스강을 통한 수륙양면 공격으로 남부연맹군 수도 리치먼드로 진격하려던 북부연방군의 계획은 남부군의 철갑증기선 버지니아의 위력에 가로막혔다. 버지니아(그림 왼쪽)와 북부군이 대항마로 건조한 철갑증기선 모니터가 햄프턴수도해전에서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미국 의회도서관
미국 남북전쟁 때인 1862년 버지니아반도와 그 양안의 요크강ㆍ제임스강을 통한 수륙양면 공격으로 남부연맹군 수도 리치먼드로 진격하려던 북부연방군의 계획은 남부군의 철갑증기선 버지니아의 위력에 가로막혔다. 버지니아(그림 왼쪽)와 북부군이 대항마로 건조한 철갑증기선 모니터가 햄프턴수도해전에서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미국 의회도서관

1862년 4월5일, 에라스무스 키이스가 지휘하는 미국 북부연방군 4군단은 버지니아반도 서쪽에서 남부연맹군과 조우했다. 4군단은 서북쪽 약 80㎞ 거리에 위치한 남부연맹 수도 리치먼드를 향해 북진하던 중이었다. 애초에 연방군은 버지니아반도 동쪽의 요크타운 주변에만 연맹군이 배치돼 있고 서쪽은 텅 비어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의 연맹군은 버지니아반도 서쪽의 워릭강에서 동쪽의 요크타운을 가로지르는 일명 워릭방어선을 구축해두고 있었다. 피해 없이 빠른 속도로 리치먼드까지 내달리려는 연방군의 계획은 이로써 틀어져버렸다.

 ◇병력 12배 적군 맞아 방어선 친 남부군 

남북전쟁은 1861년에 시작된 미국의 내전이었다. 미국으로부터 분리를 원했던 남부 7개 주는 3월4일 남부연맹을 결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연맹은 7개 주에 위치한 5곳의 연방군 요새를 비우라고 연방에 요구했다. 연방이 거부하자 연맹군은 4월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섬터요새를 포격했다. 섬터요새 주둔 연방군은 연맹군 포격으로 인한 병력 손실 없이 다음날 기지를 비웠다. 4월15일, 연방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병력 동원을 요청하자 4개 주가 추가로 연맹에 합류했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델라웨어나 메릴랜드 같은 주는 연방을 탈퇴하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주민이 연맹군에 입대했다.

미국을 두 조각 낸 연맹의 경제력은 연방에 비해 열세였다. 개전 시점에 연맹의 인구는 흑인 노예 360만 명을 포함해 약 900만 명이었다. 이는 연방 인구 2,200만 명의 반에도 못 미쳤다. 공업 생산력은 연방의 10% 정도였고 무기 생산력으로 한정하면 3%에 지나지 않았다. 내전 기간 중 양쪽이 동원한 최대 병력 규모에서도 당연히 큰 차이가 났다. 즉 연방의 210만 명에 비해 연맹은 100만 명에 그쳤다.

1862년 봄, 수적으로 우세한 연방군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조지 맥클레런이 지휘하는 동부의 이른바 포토맥군은 3월17일 버지니아 체사피크만에 위치한 먼로요새에 상륙했다. 4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으로 구성된 포토맥군에는 12만 명 이상의 병력이 있었다. 포토맥군을 상대할 연맹의 북버지니아군은 7만 명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병력 대부분은 리치먼드 북쪽 150㎞에 위치한 컬페퍼에 있었다. 당장의 버지니아반도 수비병력은 존 매그루더 휘하의 1만1,000명이 전부였다.

수적으로는 완연한 열세였지만 방어선을 구축한 매그루더군에게는 워릭강이라는 지형상의 장점이 있었다. 연방군의 3군단과 4군단은 각각 버지니아반도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했지만 포대와 진지로 강화된 연맹군의 방어를 쉽게 뚫을 수가 없었다. 4월6일 밤부터 시작된 폭우로 인해 10일까지 연방군의 공세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 사이 조제프 존스턴이 지휘하는 북버지니아군 주력은 철도를 이용해 요크타운과 워릭방어선에 충원되었다. 이제 연방군이 워릭방어선을 정면 돌파하려면 상당한 병력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수륙양공 구상 가라앉힌 철갑증기선 

맥클레런이 당초 구상했던 작전은 훨씬 입체적이었다. 그는 수륙양면 공격을 준비했었다. 즉 포토맥군이 버지니아반도를 따라 북상하는 동시에 반도 동쪽의 요크강과 반도 서쪽의 제임스강을 따라 연방 해군과 해병대가 공격에 가담하는 그림이었다. 특히 제임스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리치먼드 중심부까지 배로 닿을 수 있었다. 매그루더가 구축한 워릭방어선도 연방군이 강을 이용해 우회할 수 있다면 손쉽게 뚫을 수 있었다. 후방과 연결된 병참선의 단절을 염려할 연맹군이 알아서 후퇴할 일이었다.

맥클레런의 반도작전은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났다. 포토맥군이 먼로요새에 상륙하기 10일 전인 3월7일, 연맹 해군은 연맹 최초의 철갑증기선 버지니아를 완성했다. 4,000톤 배수량에 12문의 포를 가진 버지니아는 3월8일 햄프턴수도해전에 투입되자마자 연방해군의 프리깃(목제 범선) 컴벌랜드와 콩그레스를 연달아 침몰시켰다. 2,000톤 급의 컴벌랜드와 콩그레스가 쏜 포탄은 버지니아의 장갑에 튕겨 나왔다.

연방해군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들의 철갑증기선 모니터였다. 연맹이 버지니아를 건조 중임을 알게 된 연방은 황급히 연맹을 따라 모니터를 만들었다. 3월9일, 버지니아와 모니터는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1,000톤 급의 모니터는 무장이 빈약했지만 버지니아의 포탄에 관통되지는 않았다.

햄프턴수도해전의 한 가지 확실한 결과는 맥클레런이 계획했던 수륙양면 공격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연방 해군은 버지니아가 활동하는 제임스강에 진입하기를 거부했다. 동쪽의 요크강도 요크타운과 강 건너편 글로스터포인트의 포대를 무력화한 후에야 진입이 가능했다. 이제 맥클레런에게 남은 선택지는 참호를 파고 공성포대를 동원해 연맹군의 진지를 차례차례 파괴해나가는 방법뿐이었다.

 ◇후퇴하는 남부군을 지킨 ‘납작한 빵’ 

군사적 약자는 강자와 다른 방식으로 전쟁하기 마련이다. 강자가 하듯 정규전으로 맞서다가는 지기 십상이다. 약자가 비정규전 혹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이유는 그래야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생기기 때문이다. 군사적 약자는 무기도 비정규전에 어울리는 무기를 사용한다. 돈이 넉넉지 않은 게릴라부대는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두는 무기를 원한다. 일명 사제폭탄 혹은 급조폭발물을 군사적 약자가 즐겨 사용하는 이유다.

급조폭발물은 근래에 발명된 무기는 아니다. 1573년 독일인 사무엘 짐머만은 땅을 파 흑색화약을 묻고 그 위에 돌멩이를 쌓아 적이 접근하면 폭파시키는 일명 푸가스를 만들었다. 원래 푸가스는 원래 화로에서 구운 납작한 프랑스식 빵을 가리켰다. 고대 로마시대 때 화덕 안의 재 밑에 묻고 구워 먹은 빵 파니스 포카치우스에서 나온 말이었다. 17세기에 프랑스군 엔지니어로 이름을 날린 세바스티앵 드 보방도 푸가스 활용에 대해 언급했다. 육전의 푸가스처럼 해전에선 수뢰가 사용되었다. 가령,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19세기 중반에 기뢰를 개발해 러시아에게 팔았다. 러시아는 노벨의 기뢰를 크림전쟁 내내 사용했다.

5월1일, 이동해 온 연방군 공성포대 선발대가 사격을 개시하자 존스턴은 이제 방어선을 리치먼드 가까이로 옮겨야 할 때라고 결정했다. 5월3일까지 요크타운과 워릭강 북안의 진지에 배치돼있던 연맹군은 북쪽으로 후퇴했다. 맥클레런은 5월5일에 공성포대의 화력을 전면적으로 투사할 계획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후퇴한 연맹군 부대는 주력부대의 후퇴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연방군을 향해 더 많은 사격을 가했다.

5월4일 새벽, 연방군은 연맹군이 후퇴했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맥클레런은 휘하 3개 군단에게 즉시 전진해 연맹군이 진짜로 후퇴했는지 확인하라고 명령했다. 선두 병력이 텅 빈 요크타운에 진입한 순간 땅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연맹군 준장 게이브리얼 레인스의 지휘 하에 체계적으로 땅에 묻힌 포탄이 터진 거였다.

레인스가 포탄을 활용한 급조폭발물을 사용하기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20여 년 전 미국과 아메리칸 인디언 사이의 2차 세미뇰전쟁 때 대위였던 레인스는 이미 비슷한 무기를 만들어 썼다. 당시 레인스의 급조폭발물을 부르는 명칭은 ‘지하포탄’ 혹은 ‘육상어뢰’였다.

연방군은 레인스의 급조폭발물을 두고 비신사적인 행위라고 몹시 비난했다. 심지어 동료인 연맹군에서도 레인스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맥클레런은 급조폭발물을 발견하면 포로로 잡은 연맹군 병사를 시켜 해체하게 했다. 5월5일의 윌리엄스버그전투 후 연방군은 후퇴한 연맹군을 쫓아 북쪽으로 10㎞ 정도 진출했다가 또 다시 레인스의 급조폭발물을 만났다. 이번의 희생양은 연방군 기병대였다. 전진을 멈춘 연방군은 계속 이 길로 전진해야 할지 3일간 고민한 끝에 결국 다른 길을 택했다. 연방군의 전진을 지연시켜 시간을 번다는 레인스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되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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