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한다는 것은 집, 공간 속에 사람의 꿈과 행복을 심는 일이다. 그리고 건축가란 누군가의 꿈과 삶을 엿보며 위안과 재미를 얻는 직업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비뚤어진 감정도 본다. 두 가지 극단적인 감정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여전히 숙제다. ©게티이미지뱅크

건축은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민원을 해결하는 일이다. 3년 전쯤 이 칼럼에서 ‘이웃 되기의 어려움’이란 제목으로 건축 민원에 대해 쓴 적도 있다. 살아오면서 상상도 못 했던 불만들이 쏟아져 놀라고 황당했던 경험을 하면서 ‘설마 이보다 심한 경우가 있으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 후로 3년간 나는 차원이 다른 민원을 겪어왔고 매년 그 강도가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동안 들어주고 이해하면서 해결점을 찾았는데, 요즘엔 해결은 없고 극단으로 향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생길까, 나는 아득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말보다 법을 먼저 들먹이는 상황. 어떤 경우에도 직접 문제의 집으로 가서 주인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공사 감리자를 불러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법’으로 가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이웃보다 변호사가 더 가까운 사람들인 모양이다. 공사가 끝나면 서로 이웃이 되어 매일 얼굴을 마주칠 사이인데도 아랑곳없다. 불쾌한 이유는 창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다는 것이다. 가시 돋친 말이 쏟아져 나오자 공사를 하던 집주인도 불쾌해지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서로 법으로 가자며 큰소리가 나온다. 과연 법이 틀어진 감정을 얼마나 명확하게 해결해줄지 의문이지만.

주변 이웃들은 탁 트였던 땅에 집이 들어오니 시선을 막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며 민원을 제기한다. ‘조망권’과 ‘프라이버시’는 이런 경우 늘 등장하는 말이다. 먼저 지어졌으니 프라이버시의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어 있던 땅에 들어오는 집의 설계가 법적 오류가 없는 경우라면 프라이버시의 우선권은 의미가 없다. 공사에 방해가 되니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조망권도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되는 법적 용어다. 이 부분에 대해 설계에서는 대지 경계선에서 2미터 내에 신축하는 건물에 창이 있다면 모든 창에 가림막을 하도록 계획해야 한다. 주변 창에 영향을 주는 범위를 그 정도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과의 거리가 10미터 이상 떨어져도 프라이버시 관련 민원은 끝이 없다. 우리 집 화장실에서 새로 짓는 집 거실이 보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창을 없애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민원인도 있었고, 남쪽으로 향한 창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보이는 것이 싫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는 커튼을 자주 치겠다, 화장실에 블라인드를 달아드리겠다 등 구체적인 해결법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화를 내던 이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 들어선 집에 익숙해지고 점차 받아들이곤 한다. 시간이 약이다.

건축일을 하면서 경험한 최악의 민원을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서 경험하고 있다. 공사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골목 입구를 차로 막아놓고 사라져버리는가 하면, 현장에 나와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며 난장판을 만든다. 물 새는 것을 잡겠다며 진입로를 파헤치거나 30년간 함께 써온 출입구를 막아버리겠다고 통보한다. 불쾌함을 표시하는 정도를 넘어 노골적으로 공사 방해를 한다. 알고 보니 건축주의 땅을 사들여 대규모 개발을 하여 이익을 보려던 은밀한 계획이 틀어지자 공사를 못 하도록 계속 방해했던 것이다. 이들은 상당한 자산가들이며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일그러져 있다. 욕망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이들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건축을 한다는 것은 집, 공간 속에 사람의 꿈과 행복을 심는 일이다. 그리고 건축가란 누군가의 꿈과 삶을 엿보며 위안과 재미를 얻는 직업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비뚤어진 감정도 본다. 두 가지 극단적인 감정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여전히 숙제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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