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남편에게 심한 폭력을 당한 A(49)씨는 다음날 일하던 식당에 출근하지 못했다. 온몸이 구석구석 쑤시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얼굴에 든 멍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꺼려졌다고 한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할 말도 없었다. A씨는 집안사정을 명분 삼아 몇 차례 결근했고 결국 그 해 연말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A씨는 “출근하는 날엔 남편이 자꾸 회사에 전화를 해서 내 사정을 회사도 다 안 것 같다”며 “남편과 별거하고 싶지만 안정적인 직장이 없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A씨와 같은 이들이 가정폭력과 경력단절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 병원치료ㆍ심리상담을 받거나 법률자문을 받아야 하지만 이런 도중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근 등으로 ‘근무태만’ 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일쑤다. 지속적인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경제적 자립이 필요하지만 치료를 받으려면 실직 위험에 빠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정부 역시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자립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다는 점을 주목하고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미 경력이 단절된 피해자 위주로 제공되고, 직장을 다니는 피해자들을 위한 경력단절 예방책이 없다는 점은 문제다. 여성가족부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자립을 위해 최대 500만원의 직업훈련비를 지원하고 있는데, 피해자 보호시설에 입소한 사람에게만 제공된다. 하지만 현재 보호시설 안전방침상 직장을 다니는 피해자가 입소하기는 쉽지 않다. 가해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핸드폰 사용이 금지된데다, 출퇴근 동선 때문에 보호시설 위치가 쉽게 드러나 입소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보호시설에 입소한 피해자 1,756명중 고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전문관리직ㆍ사무직ㆍ생산직 등 근로자가 160명(9.0%)에 불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ㆍ노동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정폭력 ‘안전휴가제’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장영배 국제공공노련 한국가맹조직협회 집행위원장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폭력에 노출되는 긴급상황에 몸을 피하거나,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유급휴가를 준다면 신변 안전을 지키는 것은 물론 경력단절을 막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에서는 피해를 증명한 근로자에 1년에 최장 10일간의 유급휴가를 부여하는 내용의 ‘가정폭력 휴가’ 법안이 지난해 10월 통과됐다. 미국과 호주 일부 주와 필리핀에서도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 6월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총회에서 의결된 ‘노동세계의 폭력과 괴롭힘 제거에 관한 협약’에도 가정폭력 유급휴가 도입에 대한 권고안이 포함됐다.
우리나라에도 가정폭력 피해근로자 보호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3월 윤후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자의 치료ㆍ상담 및 주거이전 등을 위한 휴가나 업무이전을 보장하는 등 내용의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발의한 것이 전부다. 개정안은 발의 1년만인 지난 3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단 한차례 상정됐을 뿐이다.
‘가정폭력 피해자 고용안정을 위한 개선과제’를 연구한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가정폭력은 데이트폭력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추적과 스토킹이 심하기 때문에 해외의 경우 피해자의 고용주가 유급휴가 부여는 물론 비밀유지, 이메일ㆍ전화번호 변경 등 안전조치까지 취하도록 정하고 있다”며 “가정폭력 피해자가 경력을 이어가고 폭력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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