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독자들에게 부치는 글을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11월을 여는 첫날, 11월을 어떻게 지낼까 생각한 것을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어느 달도 소중하지 않은 달이 없고, 그래서 매달 어떻게 지낼지 성찰하고 계획도 세워야겠지만 제게 있어 11월은 다른 달들보다 더 옷깃을 여미며 맞이하게 하고 성찰케 합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여자들이 봄을 타는데 비해 남자들은 가을을 탄다고 하는데 제가 남자이기 때문이고, 감성적이게 되어서이기 때문일까요? 그럴 것입니다. 나이는 먹었어도 저도 남자이기에, 아니 나이를 먹었기에 더 가을을 탈 것이고, 그래서 단풍이 계곡 물에 물들 듯 가을이 제 감성에 그대로 물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11월은 가을 중에서도 늦가을이고 그래서 단풍이 다 지기 전에, 그러니까 물들은 이파리들이 다 지기 전에 어서 단풍놀이를 가 그 마지막 단풍을 놓치지 말고 보라고 재촉하듯 저를 그냥 놔두지 않고 뭔가 재촉을 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럴 겁니다. 이는 마치 더 늙기 전에, 아직 가슴이 뛰고 관절이 걷는 것을 허락할 때 여행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겨울의 바로 전 단계인 11월은 인생 가장 마지막의 직전 단계인 것입니다. 단풍이 지는 것은 인생이 지는 것인데 인생이 저물어 갈수록, 그리고 남자일수록 11월은 인생이 저무는 것을 느끼게 하고 성찰케 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저희 가톨릭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달마다 무슨무슨 성월이라고 합니다. 성월이란 거룩한 달이라는 뜻이며, 그저 물리적으로 한 달을 시작하고, 보내고, 끝내지 말고 거룩한 의미를 새기며 시작하고, 보내고, 끝내라는 뜻인데 11월은 죽음을 많이 성찰하고 죽은 사람들을 많이 기억하라는 달입니다. 희랍어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있는데 ‘Chronos’가 그저 물리적인 시간을 뜻하는 말이라면 ‘Kairos’는 의미적인 시간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2019년 11월 1일은 물리적으로 수많은 날들 중의 하나인 2019년의 한 날일 수도 있지만 50년 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의미 있는 날을 우리는 다른 물리적인 날처럼 그저 흘려보낼 수 없고 의미가 있게 보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 달도 의미있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지내는 것이 11월을 의미있게 보내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죽음을 성찰하며 의미있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제게 있어 죽음은 인생을 가장 진지하게 성찰하고, 진실하게 살게 합니다. 푸시킨의 시구대로 삶은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새옹지마라는 고사가 있지요. 나를 불행케 만든 사건이 나중에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를 행복케 한 그것이 나중에 다시 나를 불행케 한다는 얘깁니다. 내 삶의 화(禍)와 복(福), 길(吉)과 흉(凶), 행(幸)과 불행(不幸)이 자주 우리를 속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 속는 것입니다. 복을 화인 줄로 알고 속고, 길을 흉인 줄로 알고 속는 것입니다. 반대로 로또에 당첨되어 대박을 터트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쪽박을 차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간과합니다. 불행 중에 숨어 있는 행복을 간과하고, 행복 중에 숨어 있는 불행을 간과합니다. 그래서 불행에 속고, 행복에 속습니다. 그러니 속지 않으려면 둘 다 볼 수 있어야겠지요. 삶에 죽음이 있고, 죽음에 삶이 있음을 볼 수만 있다면 인생 최고, 최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삶은 우리를 속일지 몰라도 죽음은 우리를 절대 속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의 거울 앞에서 삶을 비춰보는 11월이 되시길 빕니다.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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