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의 환담 이후 한국 측의 태도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다음달 중국 청두(成都)에서 열리는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한일 정상회담 개최 여부도 갈등의 원인인 강제동원 배상을 둘러싼 해법 제시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유지 여부 등을 지켜보면서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들은 전날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 간 11분간 열린 환담과 관련해 아베 총리가 한일관계 악화의 계기가 된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판결과 관련해 일본의 원칙적 입장을 재차 전달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예정에 없는 환담을 주선한 문 대통령의 대화 의지를 부각한 한국 언론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일본 정부 발표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에게 “강제동원 피해자 등에 대한 배상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으며 국내문제로서 한국 측이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현재 외교 당국간 협의와 별개로 ‘고위급 협의’를 제안했으나 일본 정부 측은 “이전대로 외교 당국간 협의를 통해서 현안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등 양국 간 온도차이를 부각했다.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참석 당시 한일 정상회담 이후 두 정상이 현안과 관련한 대화를 나눈 것은 1년 여만이다. 지난 6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당시 단 ‘8초간’ 악수만 하고 헤어진 것에 비해선 일견 진전된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 정부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이 녹록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하고, 이번 환담이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문재인 정권이 대화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은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한국 측에서 한일이 대화가 가능한 관계라는 것을 미국에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소미아 종료를 앞두고 점점 커지고 있는 미국의 우려를 의식했다는 것이다. 요미우리(讀賣)신문도 이번 환담의 목적과 관련해 “미국으로부터 지소미아 유지를 강하게 요구 받고 있어 일본과의 대화 자세를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문재인 정부가) 내우외환으로 이보다 더 한일관계를 꼬이게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라고도 전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아베 총리가 환담에 응한 것과 관련해 “도망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아베 총리가 대화 요청을 받아들였다”며 “강제동원 배상과 관련해서 새로운 제안이 없었기 때문에 상황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중순 칠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갑작스럽게 무산된 것도 요인으로 꼽았다. 산케이(産經)신문은 “문 대통령으로서는 23일 지소미아 종료에 앞서 양국 정상이 만나 해법을 모색할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며 “이번에 아베 총리와의 환담을 연출, 문제 해결 의사가 있다는 것을 국내에 어필할 필요가 있다”고 보도했다.
문 대통령이 ‘고위급 협의’을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는 종래대로 ‘외교 당국간 대화’를 강조하며 온도 차이를 드러낸 것은 아직 정상회담을 개최할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일본 측의 판단 때문이라고 마이니치신문은 전했다. 한국 측이 제안한 고위급 협의는 역사문제(강제동원 배상)와 수출 규제 및 안보문제(지소미아)를 분리 대응한다는 ‘투 트랙 외교’의 연장선에 있다는 경계심이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철회될 경우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인데 반해,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배상문제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공은 한국 측에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향후 한국의 태도 변화와 구체적 대응을 주시하겠다는 방침이다. 지소미아 연장 등 한국 측의 태도 변화 여부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뒤 다음달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할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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