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돼지열병이 소강 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감염된 돼지는 물론 인근 지역의 돼지까지 살처분하고, 감염 원인으로 지목된 멧돼지를 포획하는 등 정부가 방역에 총력을 다한 덕분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처음 발생했던 지난 9월 나는 한 팩이면 충분한 돼지고기를 세 팩이나 샀다. 소비는 그대로인데 돼지고기의 공급이 줄어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다른 전문가들도 같은 예상을 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돼지고기 공급은 별로 줄지 않았는데 소비가 줄었고, 도매가격은 20% 이상 하락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방역 비상 사태를 겪은 중국에서 돼지고기 가격이 폭등한 사례와는 정반대의 결과다. 정부는 돼지고기 소비 촉진에 팔을 걷고 나섰다.
아프리카돼지열병에 대한 과학적 사실은 명확하다. 이 병은 치사율이 거의 100%에 이르는 바이러스성 출혈 돼지전염병이다. 백신도 치료약도 없다. 반면 사람은 감염되지 않는다. 지난 100여년간 전 세계적으로 사람에게 감염된 사례는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 게다가 감염된 돼지는 물론 인근 지역의 돼지까지 모두 살처분하니 식탁에서 감염된 돼지고기를 접할 일이 없다. 만에 하나 감염된 돼지가 도축되었더라도 찌고 굽고 끓이는 등 고온에서 충분히 가열하면 바이러스는 사멸한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까. 나는 과학적 사실이나 철저한 관리만큼이나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바로 “찝찝하다”는 소비자들의 불안 심리다. 불안감은 먹거리 소비의 치명타다. 사례는 널려 있다. 2015년 국제암연구소에서는 소시지ᆞ햄 등 가공육을 담배나 석면처럼 발암 위험성이 높은 ‘1군 발암물질’로 분류했다고 발표했다. 매일 50g의 가공육을 먹으면 직장암에 걸릴 위험이 18% 높아진다는 수치와 함께 말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일일 육가공품 소비는 50g에 훨씬 못 미친다. 그럼에도 발표 직후 마치 육가공품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암에 걸릴 것 같은 불안감에 소비는 급감했고, 육가공품 판매량은 20% 가까이 떨어졌다. 소고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2012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했다는 보도에 국내 미국산 쇠고기는 물론 한우에도 매출 한파가 몰아쳤다. 막연한 불안감으로 먹거리 소비에 타격을 받은 사례가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위험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리는 것은 위험 소통(risk communication)의 첫 번째 목적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안이나 공포와 같은 사람들의 심리가 위험 이슈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감정을 판단과 의사 결정에 직관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폴 슬로빅은 이러한 경향을 ‘감정 휴리스틱’이라고 명명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뉴스는 흰 옷으로 온몸을 감싼 가축방역관들이 돼지떼를 살처분하고 농장과 도축장을 소독하는 장면, 멧돼지들이 시내를 뛰어다니다 포획되는 장면 등을 생생하게 보도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의 기억에 저장되어 ‘꺼림직하다’ ‘불안하다’는 감정과 연결된다. 불안감은 돼지고기를 굳이 먹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오늘도 돼지고기 세 팩을 더 샀다. 돼지고기를 한 주 동안 너무 많이 먹었다는 남편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이번 주에도 직원들과 점심 식사는 보쌈, 저녁 식사는 삼겹살 등의 돼지고기 회식 일정이 잡혀 있다. 먹거리 전문가인 식약처 직원들이 열심히 먹는 모습이 ‘먹어도 문제없다’는 국민의 안심과 연결되면 소비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으로 소통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이보다 더 효과적인 소통이 없다.
백혜진 식품의약품안전처 소비자위해예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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