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에 가면 탕평비가 있다. 그 앞에 간단한 안내문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42년(영조18년)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에 영조의 어명으로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진 비석. ‘탕평(蕩平)’이란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의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온 것으로, 공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가 평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비에 새겨져 있는 ‘주이불비내군자지공심(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 비이불주시소인지사의(比而不周寔小人之私意)’는 ‘논어’ 위정(爲政)편 14장을 활용하여 영조가 지은 것으로,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는 뜻이다.(이하 생략)
이상의 안내문에서 말한 ‘논어’의 원문은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이다. 한 번 더 해석을 보태자면 ‘군자는 두루 어울리면서 당파를 만들지 않고, 소인은 당파만 만들고 두루 어울리지 못한다’라는 정도겠다. 성균관의 안내문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시대에 따라 아주 다르게 해석되기도 했다. 중국사에는 이런 장면이 적지 않다. 특정 시대를 장악했던 어떤 지식 권력은 의도성이 다분한 창의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했는데 반감을 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낯설고 거북한 해석들도 해당 시대가 가진 원전에 대한 수용 태도 및 사유 방법을 분석하는데 필요할 수 있으므로 잠깐 보기로 하자.
일례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출판된 ‘논어비주’(論語批注, 1974년)를 들 수 있다.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펴낸 이 책은 당시 중국의 학술 경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는 군자와 소인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상정하고 풀이한다.
‘논어비주’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 책에서는 실명을 써서 공구(孔丘)가 노동 인민을 무시해 사용한 칭호가 ‘소인’인데, 때로는 신흥 지주 계급으로 대표되는 정치 세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노예주 계급의 도덕을 어기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논어비주’의 주석에 따르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사용한 군자와 소인은 정치적 용어로 쓴 것이다. 따라서 ‘君子周而不比’는 군자가 노예의 반란을 진압하고, 신흥 지주 계급의 개혁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小人比而不周’는 노예들이 단결해 반란을 일으키는 일과 신흥 지주 계급이 결사(結社)하여 개혁 하는 것을 비난한 말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당시의 정치 상황이 고전 해석에도 개입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애초 춘추시기 ‘군자’ ‘소인’이란 말은 신분에 따른 구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인품의 고하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는 말로 쓰기 시작한다. 요새말로 젠틀맨과 소인배 정도로 사용한 것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두 개념을 혼용하여 썼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의 속뜻은 무엇일까. 전후 사정이 없는 발언이라 추측하기 어렵지만, 다행히 ‘논어’에 다른 단서가 보인다. 역시 공자의 말로 유명한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이다. 풀이하면 ‘군자는 조화롭게 어울리지만 부화뇌동 않고, 소인은 맞장구만 치지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못한다’겠다. 얼핏 보아도 요지는 ‘주이불비 비이불주’와 같다.
공자 시대에 ‘화(和)’와 ‘동(同)’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지할 수 있는 문헌이 적지 않은데, 그중 ‘좌씨전(左氏傳)’에 보이는 안자(晏子)의 언설이 가장 탁월하다.
춘추시대 제나라 경공에게 양구거라는 신하가 있었다. 경공은 그가 자기와 ‘和’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재상 안자가 그것은 ‘同’이지 ‘和’가 아니라고 한다. 안자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和’는 국의 간을 맞추는 일과 같다. 갖은 재료를 물과 불로 끓이면서 조리사가 맛을 맞추는데 간을 보고 모자라는 것은 더 넣고 많은 것은 덜어낸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이래야 ‘和’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찬성하더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신하는 바로잡아야 하고, 임금이 반대하더라도 그것이 옳다면 신하는 할 말을 해야 한다. 이래야 정치가 공평해져 서로 충돌이 없고 백성들도 다투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러나 양구거는 임금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하고, 임금이 틀렸다고 하면 틀렸다고 한다. 만약 물에다 물을 탄다면 누가 그것을 먹겠는가. 이래서야 국 맛이 나겠는가. 합주하는데 악기마다 동일한 음만 낸다면 누가 그런 음악을 듣겠는가. 이런 상황을 ‘同’이라고 한다. 오미(五味)와 오성(五聲)이 어우러져야만 맛도 멋도 난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가 ‘同’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안자의 말을 곱씹어보면 ‘탕평’은 아무래도 임금의 자세에 달린 것 같다. 임금 자신의 입맛이 한 쪽에 치우쳐 있으면 국의 간을 맞추기는 힘들 테고 음감이 없어도 또한 난감하다. 그럼에도 군자는 균형을 잡으려 애쓰며 소임을 다했겠고, 소인이야 늘 맞장구를 치면서 명철보신 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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