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작가 A씨는 10여년 전 영화계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다. 30대 초반에 국내외 여러 영화상에서 각본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감독 지망생이었던 그는 곧 장편 데뷔작을 내며 한국 영화계 기둥 중 하나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장편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10년 사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어쩔 수 없이 ‘경단녀’가 됐다. 재능 있는 남성 감독 지망생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영화계는 특히 일을 놓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일선 복귀가 쉽지 않다. 여성 영화인에게 현실은 더욱 매정하다.
요즘 극장가 화제작인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다 문득 A씨를 떠올리게 됐다. 영화는 차별 받고 자란 후에도 가부장제 부조리에 고통 받는 여성 모습을 그린다. 좋은 건 남동생에게 양보해야 했고, 남학생에게 성추행 당하고도 조신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며 아버지에게 타박 받아야 했던 김지영이 결혼 후 살아가는 모습을 중심으로 우리사회의 현재를 들여다본다. 어느 집에서나 있을 만한, 어느 여성이나 겪었을 만한 사연이 스크린을 채운다. ‘82년생 김지영’은 지난달 23일 개봉해 2일까지 226만4,635명을 모았다. 3일에는 250만 관객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극장가 비수기인 늦가을에 흔치 않은 흥행세와 관객들의 쏟아지는 공감에 영화의 주인공 김지영(정유미)과 A씨의 처지가 오버랩 됐다.
여성 감독의 영화 제작 편수만 봐도 여성 영화인의 현실을 가늠할 수 있다.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 흥행 순위 100위에 든 작품(9월 기준) 중에서 여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모두 9편이다. 여성 감독 작품이 9%에 불과한 셈이다. 이 중 상업영화는 ‘생일’(감독 이종인)과 ‘썬키스 패밀리’(감독 김지혜) 2편뿐이고 나머지는 저예산 독립영화다. 한국에서 여성이 메가폰을 잡기는 쉽지 않다. 흥행 감독이 되는 길은 더욱 험난하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치로 따지면 더 엄혹하다. 미국 연예전문지 버라이어티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흥행 순위 100위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3.6%였다. 2017년 7.3%보다 감소한 수치다. 올해는 사정이 좀 나아져 적어도 12편 가량의 여성 감독 영화가 흥행 100위안에 들어갈 전망이다. 할리우드에서 여성 인력의 활약상 여부는 뜨거운 이슈다. 2017년엔 패티 젱킨스 감독이 ‘원더 우먼’을 연출하며 여성 최초로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의 감독직에 앉았다는 점만으로도 할리우드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상이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는 하다. 한국 여성 감독 1호인 박남옥(1923~2017) 감독은 데뷔작이자 마지막 영화인 ‘미망인’(1955)을 연출했을 때 공보처 녹음실 관계자로부터 “연초에 16㎜ 작품에다 여자 작품은 녹음할 수 없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모습이다.
여성에 대한 대우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나 현실에 만족해야 할까. 여성 감독의 영화가 10% 남짓이라는 건 세상의 이야기 절반이 사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미망인’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전후 한국사회 풍속도를 그려낸다. 남성 감독이라면 포착하지 못했을 시대의 단면이 스크린에 ‘보존’됐다.
여성 인력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도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늘어나야 한다. 지난 10월 개봉해 287만 관객을 모은 로맨스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는 여성 영화인의 합작품이다. 제작자(영화사 봄 이유진 대표)도 프로듀서(오효진)도 감독(김한결)도 여성이다. 영화에는 수위 높은 성적 대사가 종종 등장하는데 유쾌한 웃음을 안긴다. 여성 영화인들의 작업이기에 가능한 결과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서른 개 가까운 상을 받아 화제를 모은 ‘벌새’의 김보라 감독도 여성 영화인의 재능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여성이 한국 영화의 미래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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