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교육 수장의 실언으로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던 대학입시용 영어 민간시험이 전격 보류됐다. 2017년 7월 해당 시험의 도입을 결정한 이후 지속돼 온 교육 현장의 재검토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일본 정부가 후퇴한 배경에는 최근 일주일 간 두 명의 장관이 낙마한 데 따른 정권의 위기의식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장관은 1일 기자회견에서 “경제 상황이나 거주 지역에 관계 없이 동등하게 안심하고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배려 등의 준비상황이 충분하지 않다”며 2024년까지 새로운 제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언론들은 ‘보류’라고 보도했지만, 제도를 원점 재검토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도입 자체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하기우다 장관은 지난달 취임 후 기자회견에서 영어 민간시험을 예정대로 실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실시를 연기할 경우 2년 넘게 준비 해온 대학과 고등학교 등 현장의 반발과 혼란을 부를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시행 보류 발표로 혼란을 야기하게 된 발단은 결국 자신의 발언이었다.
그는 지난달 24일 위성방송 BS후지에 출연해 “부유한 가정의 자녀가 여러 번 시험을 쳐서 워밍업을 하는 식의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신분에 맞게 두 번을 골라서 노력하면 (된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경제력과 도농(都農) 간 차이에 따라 응시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되기 어렵다는 지적을 도외시한 발언이었다. 논란의 핵심이었던 ‘교육 격차’를 당연시하는 태도에 학생들은 물론 야당들의 반발이 들끓었고, 장관의 발언 철회와 사죄에도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다 최근 1주일 새 경제산업장관과 법무장관이 금품과 관련된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이 불거지면서 낙마한 정치적 환경이 결정적이었다. 야당들의 타깃이 아베 총리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불리는 하기우다 장관으로 옮겨가면서 정부ㆍ여당에선 ‘장관들의 도미노 사임’에 대한 위기감이 커졌다. 총리관저에선 “세 번째 사임이 나오면 어떻게 하나”라는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자민당에서도 “영어 민간시험을 강행할 경우 정권 지지율에도 영향을 준다”는 의견이 제기됐다고 마이니치(每日)신문이 전했다.
아베 정권 입장에선 이번 국회에서 미일 무역협정의 승인을 앞두고 있는 데다 개헌 논의의 본격 추진을 노리고 있어 장관들의 낙마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야당은 6일 중위원 예산위원회와 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총리를 상대로 장관 임명 책임을 철저하게 추궁하겠다는 방침이다.
한편 민간시험 실시 단체들과 정부 방침에 따라 준비해 온 학생들은 정부의 발표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됐다. 한 시험단체의 경우 시험장소 확보와 관련 장비 구입, 성적 발송 시스템 개발 등의 투자를 꾸준히 해 왔다. 수험생들도 “경제력ㆍ지역 간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게 다수의 반응이지만, “장난도 적당히 하라”, “정부에 좌지우지되는 느낌”이라는 불만이 제기됐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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