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이 불러낸 서사의 힘
보통명사 아닌 고유명사로서 다가와
당신의 이야기를 오롯이 들려 주세요
70년생 이OO. 사회복지 전문가를 꿈꿨으나 복지기관의 좁은 문을 뚫지 못하고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으면서 전업주부가 됐다. 둘째가 태어날 무렵, 애 봐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동동거리는 워킹맘 언니가 안쓰러워 손을 내밀었다. 소정의 대가를 받으니 서로 좋은 일 아니냐 싶었지만, 갓난아기 키우며 졸지에 초등학생 조카 학부형 노릇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상했다. 고생이 끝나갈 무렵, 언니가 덜컥 둘째를 낳았다. 저 알아서 살겠지 하며 독하게 마음먹었지만, 언니의 고단한 처지를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파트타임 일이라도 해 보려던 참이었다. 다시 둘째 조카를 돌보며 두 집 살림을 떠안았다. 나의 동생 이야기다.
꼬박 15년을 함께한 동생이 새 일을 찾았다. 학원 갈 시간도, 돈도 여의치 않아 설거지하고 빨래 개는 동안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공짜 인강을 들으며 어렵게 딴 자격증을 들고서. ‘퇴직’하는 동생에게 나는 그저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나도 고마워. 언니 덕에 대출금 갚고 애들 학원비도 보탰잖아. 힘들긴 했어. 몸보다 마음이. 나는 여기가 직장이다 생각하고 일했는데, 아무도 나를 ‘일하는 사람’으로 봐주지 않더라고. 남편도 아이들도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그게 제일 서럽더라.” 동생을 보낸 뒤 한참을 울었다. 그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자책에, 그리고 20년 경력 단절 여성이란 꼬리표를 달고 새 일터에서 겪게 될 또 다른 시련이 안쓰러워서.
82년생 김지영. 2년 전 소설을 읽었을 땐 그리 공감하지 못했다. 이 땅의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겪어 온 일들을 한 사람의 삶에 빽빽이 욱여 넣은 듯한 이야기가 ‘문학’은 어떠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과 줄곧 불화했다. 돌이켜 보면, 그보다 더한 야만의 시절을 억척스레 견디고 헤쳐 온 수많은 여성의 삶에 나의 분투기를 슬쩍 끼워 넣으며 옹졸한 자만심에 취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얼마간은 의무감에 영화를 봤다. 개연성을 따지고 만듦새를 평하려 드는 직업적 습성을 내려놓자, 한 여자의 삶이 오롯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대목에서 가슴이 아렸고 눈물을 훔쳤다. 누군가의 평처럼 ‘경험의 보편성’에 절절히 공감해서가 아니다. 남들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그만의 삶을 살아내며 상처 입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한 여자의 이야기. 요컨대 내겐 ‘82년생 김지영’이 동시대 여성을 아우르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다가왔다. 두 살 터울로 많은 경험을 공유했지만 나와 다른 상처를 지닌 동생의 삶을 뒤늦게 이해하고 지지하게 된 것처럼.
이 땅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 그리고 상처를 말하기 위해 누군가의 경험이 전형적이고 일반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우리는 오래 시달려왔다. 나도 그랬다. 어느새 최고참 여기자가 된 나의 평판이 혹여 후배들에게 누가 될까 전전긍긍하는 사이, “여자가 어디…”라거나 “여자가 별 수 없지”란 부당한 평가에 맥없이 포획되곤 했다. 경험의 공유는 연대의 필수요건이 아니다. 45년생 아무개, 68년생 아무개, 96년생 아무개…. 우리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같거나 다른, 때로는 아주 특별하기도 한 나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
41년생 손OO. 평생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할머니로 아낌없이 주기만 한 엄마의 삶은 어땠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요?” “글쎄, 국민학생이 좋겠네. 공부 좀 실컷 해 보게.” 간신히 중학교만 마친 엄마는 갓 태어난 막내를 등에 업고 틈틈이 공부해 방송통신고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요즘도 구청 문화센터에서 몇 년째 일본어를 배운다. 영화를 본 뒤, 한동안 잊고 있던 인터뷰 생각이 났다. 내가 몰랐던 엄마 이야기를 다시 찬찬히 듣고 싶다.
고 김서령 작가는 식민지와 전쟁, 독재 시절을 살아낸 일곱 여성의 삶을 기록한 ‘여자전(女子傳)’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 거기 꽃 피고 새 울고 천둥 치고 바람 부니 머지않아 열매 맺을 것이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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