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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학점 1.46’의 영화광 ‘범죄영화 제왕’이 되다

입력
2019.11.02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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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재미에 충실한 장르 영화 감독 최동훈의 등장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최동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은 한국은행을 터는 여러 범죄자들의 관계를 통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유발하며 새로운 한국 범죄 영화의 도래를 알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동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은 한국은행을 터는 여러 범죄자들의 관계를 통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유발하며 새로운 한국 범죄 영화의 도래를 알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범죄의 재구성’(2004)은 한국 영화사상 충격적인 데뷔작 중 한 편이었다. 한국은행 구미사무소가 위조 당좌수표에 의해 9억원을 털린 1996년 2월의 실화를 각색해 5인조 사기단의 속고 속이는 복마전을 그렸다. 작가주의에 대한 강박을 벗어 던지고 완결성 있는 서사와 스타일, 생동감 있는 캐릭터와 세련된 화술로 무장한 웰메이드 장르영화가 한국 대중영화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역작이었다. ‘범죄의 재구성’은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범죄영화가 유행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212만 관객을 모으며 데뷔작부터 흥행한 최동훈 감독은 ‘타짜’(2006)와 ‘전우치’(2009), ‘도둑들’(2012), ‘암살’(2015)을 잇달아 성공시키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며 한국 상업영화의 큰 축으로 우뚝 서게 된다.

 ◇‘펄프픽션’ 보고 진로 결심한 영화광 

최 감독은 중학교 시절부터 동시상영관에서 ‘깊고 푸른 밤’(1984), ‘어우동’(1985), ‘드레스드 투 킬’(1980), ‘보디 히트’(1981)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보며 주말을 소일했다. 방송사의 ‘주말의 명화’도 빼놓지 않고 챙기던 열렬한 영화광이었다. 서강대 국문학과에 진학하고서도 다르지 않았다. “군대 가기 전 학점이 1.46이었으니 늘 ‘선동열 방어율’을 유지했다. 공부 못하면 자르는 학교인 관계로 생존 학점만 겨우 챙기며“ 영화동아리 서강대영화공동체에 들어가 영화를 보는데 열중했다. 그리고 이 시기, 군대에 다녀온 그는 자신을 감독의 길로 이끄는 운명의 영화를 만나게 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픽션’(1994)이었다. 범죄영화에 대한 애정과 화려한 ‘대사빨’은 일찍이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내 흥분된 상태로 봤다. 그때까지 영화를 공부하고 감상하면서 ‘형식’에 대한 강박이 있었는데, 영화를 제 맘대로 만들어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아무 것도 아닌 대화로 시작하는 오프닝인데, 마치 둘의 대화가 내 두뇌를 신선하게 ‘긁는’ 느낌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제작비로 쏟아 16㎜ 필름으로 찍은 5분짜리 단편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야말로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졸작’이었지만, 영화를 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떳따 최선생’이란 직함으로 논술강사 생활을 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 연출부에 지원했다가 떨어지는가 하면, 한국영화아카데미 진학을 준비하면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비롯해 단편 희곡을 각색하는 식으로 10편의 습작 시나리오를 썼다. 1997년에 쓴 최동훈의 첫 시나리오는 대학생 다섯 명이 은행을 합심해 턴다는 내용의 ‘강탈영화(케이퍼 무비ㆍCaper Movie)’였다. 전혀 다른 내용이라지만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의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이미 있었던 셈이다. 영화아카데미 연출 전공 15기로 들어가 영화 내공을 쌓아가던 최 감독은 임상수의 ‘눈물’(2000)에 연출부 조감독으로 들어가 3개월 간을 가리봉동 인근 700여명의 가출 청소년들을 취재하게 된다. 이 인연은 ‘바람난 가족’(2003)과 ‘그때 그 사람들’(2005)의 카메오 출연으로 이어진다.

최동훈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동훈 감독.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동훈 감독은 두 번째 영화 '타짜'로 흥행 감독의 기반을 다진다.
최동훈 감독은 두 번째 영화 '타짜'로 흥행 감독의 기반을 다진다.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만 16번 고쳐 써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영화사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제안한 저예산 디지털 기획이 무산되었고, 두 편의 각본을 잇달아 썼지만 제작에 들어가진 못했다. 실패를 겪은 뒤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쓴 게 바로 ‘범죄의 재구성’이었다. 착수금 300만원을 받고 집필에 들어간 각본은 2년 동안 수정을 거듭했고, 배우 박신양을 캐스팅해 크랭크인을 하기까지 8개월을 더 붙잡으며 시나리오를 ‘16고’(16번째 완결판)까지 고쳐야 했다. 이 시기에 안수현 프로듀서를 만났다. 안 프로듀서는 미국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봄날은 간다’(2001)의 제작부장으로 일하며 싸이더스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있었다. “사실 제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 연출을 막 맡았을 때 제가 제작자인 차승재 대표님에게 PD(프로듀서)는 안수현씨를 붙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책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 그 영화의 시간’) 첫 작품에 들어가려는 신인 감독과 영화사 직원의 만남은 시나리오를 모니터링하고 조언과 격려를 주고받으면서 3년간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졌다. ‘전우치’를 마친 후 최 감독과 안수현 프로듀서는 영화사 케이퍼 필름을 설립해 부부이자 창작 파트너로 협업하며 ‘도둑들’과 ‘암살’로 2회 연속 1,000만 흥행이라는 성과를 합작해낸다.

만화 원작 ‘타짜’의 영화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최 감독은 “이미 읽어봤지만, 도저히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두 번 거절했었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에게도 갔다가 돌아온 ‘타짜’의 감독 자리를 수락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최 감독은 차기작으로 준비하던 1974년 카빈 강도 사건(최인호의 ‘지구인’으로 소설화되었고 이장호의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로 영화화 된 전례가 있다)에 관한 영화가 엎어진 후 “다시 읽어보고 거절하라"는 차승재 대표의 권유를 받고 나서 ‘타짜’에 흥미를 갖게 됐다.

최동훈 감독의 첫 1,000만 영화 '도둑들'.
최동훈 감독의 첫 1,000만 영화 '도둑들'.

 ◇‘밑장빼기’까지 배우며 만든 ‘타짜’ 

원작 만화의 허영만 작가로부터 각색 허락을 얻은 최 감독은 스케일이 방대한 만화에서 1부 ‘지리산 작두’편만 가져왔다. 1950년대 말~60년대 초로 설정되어있던 시대 배경을 90년대로 바꾸고 정 마담(김혜수)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으로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간결하게 압축했다. 챕터 10개로 나누는 구성은 ‘섰다’가 화투 10장을 가지고 치는 노름이라는 데서 착안했다. 2004년 크리스마스 때 본 체호프의 원작 연극 ‘세자매’의 1부가 한 집에 한 명씩 인물이 등장하면서 드라마가 전개되고, 손님들이 한 사람씩 사라지면서 정리되는 걸로부터 플롯의 힌트를 얻었다. 각색 초안 작업에만 꼬박 1년이 소요되었다.

원래 감독이 쓴 ‘타짜’ 시나리오의 결말은 고니(조승우)가 살아남는 버전과 고니가 죽음을 맞는 또 다른 버전이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고만 죽이라”고 조언해 고니가 생존하는 결말을 선택하게 된다. 차승재 대표는 장동건을 고니 역으로 점 찍어두고 있었지만, 최 감독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조승우가 방방 뛰는 고니 역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평경장 역의 백윤식 또한 초기 구상 단계에서부터 내정된 캐스팅이었다고 한다. 배우들은 1980년대 실제 타짜였던 장병윤씨로부터 기술을 배웠고, 제작진은 돈을 좇아 떠도는 실제 타짜들 인생마냥 전북 전주와 익산, 군산, 경남 진해, 부산 등 전국을 돌면서 촬영을 했다(배우들은 ‘밑장빼기’ 기술을 어려워했고, 최 감독만 성공했다. 평경장의 집에서 고니가 노름 수련을 할 때 ‘밑장빼기’하는 손은 바로 최 감독의 것이다). 2006년 9월 28일 개봉한 ‘타짜’는 청소년관람불가임에도 불구하고 684만명이라는 흥행을 거두어 흥행감독 최동훈의 위상을 확고히 하게 한다.

‘타짜’를 끝낸 뒤에도 최 감독은 쉼 없이 차기작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2007년 결혼 후 영국 스코틀랜드 여행 때 현지 가이드로부터 잉글랜드에 대항한 독립투쟁사를 들은 걸 계기로 1930년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다룬 ‘암살’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암살’의 각본 작업이 풀리지 않는 동안, 화장실에서 ‘삼국유사’를 읽는데 콩을 병사로 변신시켜 용을 무찌른 혜통 스님의 일화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쳐 ‘전우치’를 만들었다.

영화 '암살'. 최동훈 감독은 '도둑들'에 이어 두 번 연속 1,000만 관객을 동원하게 된다.
영화 '암살'. 최동훈 감독은 '도둑들'에 이어 두 번 연속 1,000만 관객을 동원하게 된다.

 ◇영화 동지이자 아내 안수현 대표 

‘도둑들’과 ‘암살’ 제작 때는 안수현 대표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안 대표는 '너는 내 운명'(2005)의 프로듀서와 '박쥐'(2009)의 제작자로 쌓으며 관록을 쌓았다. ‘도둑들’에서 예니콜(전지현)과 잠파노(김수현)가 키스할 때 "입술에 힘 좀 빼"란 대사가 나오는데, 최 감독과 안 대표의 연애시절 에피소드에서 가져왔다. 안 대표는 ‘암살’에서 각각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집안의 규수로 자라게 된 쌍둥이 여성 주인공을 제안하는 등 여러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영화적 스타일, 물론 스타일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스타일에 신경을 더 쓰려하지 않죠. 전 형식적으로도 계속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그게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하잖아요. (중략) 그러니까 놀라운 숏을 찍으려는 어떤 순수한 마음이 있는 거죠.”(지승호 인터뷰집 ‘영화, 감독을 말하다’)

최 감독의 영화에는 교훈에 대한 강박이 없다. 그의 영화 저변에는 작가의 입장에서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자신이 보고 싶고, 열광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장르의 유희 정신이 깔려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시대의 정서적 리얼리티를 불어넣는다. 장르 영화의 순수한 미덕을 아는 감독, 대중의 시선과 호흡에 박자를 맞출 줄 아는 감독 최동훈의 존재는 현재 한국 상업영화가 가야 할 길을 지시하는 하나의 이정표로 우뚝 서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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