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황각규 부회장, 임원 간담회서 “장밋빛 계획 그만, 비상체제 전환”
대기업 총수들 잇달아 위기론 제시… 국내외 기관은 내년 1%대 성장 예측
재계 5위 기업인 롯데그룹이 지난 30일 신동빈 회장 등 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이 집결한 경영 간담회에서 “향후 발생 가능한 외환 및 유동성 위기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며 비상경영체제 전환을 선언했다. 내수 침체와 글로벌 업황 악화 등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 마치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만큼 심각하다고 진단한 것이다.
롯데그룹 최고경영진 150여명이 참석한 이날 경영 간담회에 앞서 황각규 부회장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장밋빛 계획이나 회사 주변 환경만 의식한 보수적 계획 수립은 지양하라”며 “미래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하라”고 주문했다.
현재의 경제 상황을 ‘최악의 위기’로 여기는 곳은 롯데그룹 뿐만 아니다. 삼성 SK LG 등 주요 대기업도 사실상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반도체 업황 악화로 실적이 ‘반토막’난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6월 “어느 기업도 1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며 “그동안의 성과를 수성(守城)하는 차원을 넘어 새롭게 창업한다는 각오로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세계 1위 기업인 삼성전자도 언제든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론을 강조한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9월 미국 워싱턴DC에서 “SK 회장을 한 지도 20년 정도 되는데, 20년 동안 이런 종류의 지정학적 위기는 처음 맞는 것 같다”며 “적응하는 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리스크가 앞으로 30년은 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지난 9월 사장단 워크숍에서 한국 경제를 저성장 기조가 장기간 지속되는 ‘L자형 경기 침체’로 진단했다. 그는 “앞으로 몇 년이 우리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비상경영체제 전환을 선언한 롯데는 지난해 10월 신동빈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직후 2023년까지 국내외 전 사업 부문에 걸쳐 50조원을 투입하겠다는 공격적인 투자 계획을 밝혔었다. 그런데 1년만에 그룹 차원에서 ‘될만한 목표에 제대로 투자하고 수시로 점검하자’는, 경각심을 담은 메시지를 내보낸 것이다. 사업 계획 발표 후 신 회장이 지난 1년간 맞닥뜨린 국내외 경제 상황이 그만큼 위중한 상태였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경제에 대한 낙관론을 고집했던 정부도 뒤늦게 위기 상황임을 인정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소비와 투자 부진에 대해 “글로벌 금융위기나 외환위기 정도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금 경기가 1997년과 2008년 위기 당시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올해보다 내년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할 거란 암울한 전망은 국내외 기관의 공통된 시각이다. 해외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7%로 내놨는데,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BoAML)는 그보다 낮은 1.6%를 제시했다. LG경제연구원 1.8%, 국가미래연구원 1.9% 등 국내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1%대 성장률을 예상했다.
당장 기업 투자 감소로 국내 산업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제품 연구 개발이나 생산 라인, 인력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 경우 기업들의 기초체력이 떨어지고, 대기업들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은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천구 대한상공회의소 SGI(지속성장 이니셔티브) 연구위원은 “위기 상황에서 기업들이 비용, 지출 요인과 투자계획, 고용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대응이지만, 민간(기업) 투자 감소는 중장기적인 성장 동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고,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함께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된다”고 말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