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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멍이 시를 주고, 뼈가 시를 줄 수밖에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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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멍이 시를 주고, 뼈가 시를 줄 수밖에 없음을”

입력
2019.11.01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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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사 데일리워드. ⓒ마이크 코발
이르사 데일리워드. ⓒ마이크 코발

“어떠냐고 그들이 묻거든/도둑맞았다고 말하지 말라. 잊혔다고,/묵살당하고,/무시당했다고 말하지 말라. 감히 ‘고아’라고 말하지 말라./체제에 짓밟혔다고/억압당하고 방해 받았다고 말하지 말고/감히 실망했다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말라/망가졌다고 말하지도 말라./웃어라./이를 전부 다 드러내고 웃어라, 아무리/썩은 이라도./심지어 썩은 이라도.”(‘그들이 묻거든’ 일부)

시는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시는 환희, 슬픔, 사랑에서 태어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통에서 피어난다. 절망과 비극을 뚫고 시로 다시 태어나 비로소 환해진 역사와 경험을 우리는 안다. “모든 흑인 소녀들이 고마워할 단 하나의 시집”이라는 평과 함께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르사 데일리워드의 데뷔 시집 ‘뼈’가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시는 기억에 처박혀 살고, 기억은 뼈에 처박혀 산다.” 책은 뼈에 새겨진 고통을 증언함으로써, 그 고통을 밝은 자리로 데려오는 시의 본령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데일리워드는 영국의 모델이자 배우로, 인스타그램에 시를 쓴다. 15만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이 인플루언서는 동시에 15만명의 독자를 지닌 시인이다. 영국 잉글랜드 북부의 소도시 촐리에서 자메이카 출신 어머니와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0대 때부터 런던에서 모델로 활동하다 20대 중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2013년 단편소설집을 발표했고 2014년 자비 출판한 시집 ‘뼈’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단숨에 주목받는 젊은 시인이 됐다. ‘뼈’는 2017년 펭귄북스를 통해 정식 출간됐다.

이르사 데일리워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시(왼쪽)와 이르사 데일리워드. 인스타그램 캡처
이르사 데일리워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시(왼쪽)와 이르사 데일리워드. 인스타그램 캡처

데일리워드가 쓰는 시의 소재는 젊은 흑인 여성으로 성소수자인 자신이다. 어린 나이에 견뎌야 했던 성폭력, 주변의 2차 가해, 비틀리고 상처받은 자아, 섹스로만 존재했던 자신의 몸. 데일리워드는 뼈와 몸에 각인된 이 고통을 언어로, 궁극적으로는 시로 승화시킨다.

“자기. 이제 그런 옷은/입지 마. 옷이 그렇게/달라붙지 못하게 하란 말이야. 이런/쉬운 패션은 따르지 마,/(…)너는 느린 열병이야. 그렇게 매력적으로/굴지 마, 재밌고 위트 있고 똑똑해서도 안 돼./네가 지금 협소한 공간에 혼돈과 정체를/초래하고 있잖아. 너는 일어나려고 대기중인/사고야.” (‘비상경고’ 일부)

“그리고 종종 그들은 말한다/네가 그걸 원하는 거라고/그리고 가끔은 너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안 그러면 어떻게 찢긴 살을 봉합할까?/안 그러면 어떻게 몸이 살아남을까?”(‘뼈’ 일부)

“아빠는 입으로 거친 숨을/몰아쉬고/오늘밤 아빠 자신도 확실히 잘 모르는/이유로/불꽃이 번쩍 튈 만큼 너를 때리기로/작정했다./너는 피멍이 든 채 떠날 것이다./너는 피멍이 든 채 떠날 테지만/이것이 네게 시를 주리라.”(‘시’ 일부)

‘뼈’가 시적인 음률에 집중한다면, 함께 출간된 에세이 ‘테러블’은 시의 행간에서 생략됐던 작가의 구체적 사연을 들려준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한 어머니, 그 결과로 태어난 사생아 데일리워드, 아버지가 다른 오빠와 남동생, 어린 데일리워드의 잠옷 속을 훔쳐보던 양아버지, 술과 마약이 일상이 된 10대 시절, 그 모든 것의 결과로 자신을 갉아먹던 우울증과 자기혐오까지. 그러다 떠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를 만나 자신의 뼈와 내장을 꺼내 보이면서 데일리워드는 끝내 사랑을 애기할 수 있게 된다. 데일리워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은 괴롭지만 동시에 ‘뼈’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브텍스트로 훌륭히 기능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중에서도 삶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짜깁기하는 데 특화돼 있는 인스타그램을,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고 이를 봉합하는 전시장으로 만드는 데일리워드의 작업은 놀랍다. 책의 한국 출간을 기념해 데일리워드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메시지를 전했다. “자신들의 목소리로 발화하지 못해 온 한국의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는 한국일보의 질문에 데일리워드는 “여러분의 목소리는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말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고립감을 멈춰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 하나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는 서로를 굳세게 할 수 있고, 비폭력 의식을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구할 것입니다.”

책의 서문에서 데일리워드는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펼쳐진 일들을, 심지어 끔찍한 일들마저 사랑하며.” 끔찍한 일들마저 사랑하게 하는 일, 시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뼈ㆍ테러블 

 이르사 데일리워드 지음ㆍ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각 240쪽, 336쪽ㆍ각 1만2,800원, 1만3,8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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