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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서 40년간 양복 원단 한 우물 “신용이 가장 큰 자산이죠”

입력
2019.11.02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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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양복 원단 업체 ‘동양직물’ 

 10년간 장사 배워 1980년 창업 

 위기 땐 양복 원단 승복 등 

 차별화된 아이템으로 승부수 

 올해 7월엔 ‘백년가게’로 선정 

지난 30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내 자리한 동양직물에서 만난 김기준 창업자가 주요 제품인 원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 30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내 자리한 동양직물에서 만난 김기준 창업자가 주요 제품인 원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제가 인터뷰 깜냥이 되겠습니까?”

부담스러워 했다. 일반 대중에겐 친숙한 분야가 아닌 기업간거래(B2B) 업종인 데다, 언론 노출에 대한 소상공인의 태생적인 염려로 읽혔다. 지난 30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내 동양직물 사무실에서 만난 김기준(71) 대표는 “성공한 다른 소상공인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겸손했지만 김 대표는 사실 국내 양복 원단 도·소매 분야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김 대표는 1980년 광장시장에 동양직물을 창업한 이후 숱한 풍파 속에서도 한 우물만 파왔다. 동양직물 개업 이전, 말단 사원으로 원단밥을 먹기 시작한 10년 세월까지 합하면 50년에 가까운 그의 인생은 직물 속에서 보냈다. “감회가 새롭네요. 곁눈질을 하지 않고 원단에만 매달려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아직도 해야 할 일은 한참 남았는데도 말입니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보단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걱정이 앞선 듯 했다.

김 대표의 걱정과는 달리, 동양직물은 올해 7월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백년가게’로 선정될 만큼 경쟁력을 인정 받았다. 백년가게 육성사업은 중소기업청에서 30년 이상의 우수 소상공인 등에게 100년 이상 존속 가능한 업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1980년에 창업한 동양직물은 100년 전통의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서 숱한 위기 속에서도 40년 가까이 터줏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배우한 기자
1980년에 창업한 동양직물은 100년 전통의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서 숱한 위기 속에서도 40년 가까이 터줏대감으로 자리잡고 있다. 배우한 기자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다 

김 대표와 동양직물의 예기치 못한 인연을 살펴보기 위해선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 진학에 실패했어요. 여의치 못했던 가정 형편 탓에 재수를 위한 학비가 필요했습니다. 잠시, 학비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찾았던 일자리가 제 삶의 항로까지 결정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터닝포인트로 들어섰던 50년전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는 특히 당시, 친구 소개로 취업한 광장시장내 양복 원단 업체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학력수준 등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자신 보다 두 배나 많은 월 6,000원의 급여를 받아간 또래 동료들을 바라보면서다. 어려서부터 지기 싫어했던 그에겐 쇼크에 가까웠다. “대학에 떨어지고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던 저에게 새로운 동기부여가 주어진 셈이었어요. 당장, 동료들부터 따라잡아야 했습니다.” 경쟁의식을 탑재한 그는 생활태도부터 달라졌다. 이른 새벽부터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면서 가게 주인에게 점수를 땄다. 행운도 찾아왔다. 어느 날 가게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찾아온 손님에게 원단을 판매하면서다. “가게에서 일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출내기가 물건을 팔았다는 게 당시로선 놀라운 사건으로 시장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김 대표는 자신이 직접 처음으로 거래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했다. 최소 6개월은 지나야 손님에게 겨우 물건을 소개할 수 있었던 업계 관행에 비춰볼 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번지르르한 말로 손님을 현혹하긴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한 달도 안된 초짜라고 전하고 손님에게 원단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솔직하게 정성껏 설명했어요. 아마 이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첫 거래 성사로 연결된 비결을 고객에게 대한 진정성에서 찾았다.

그에게 긍정적인 상황은 계속됐다. 갑자기 찾아온 외국 손님에게 짧은 영어로 원단을 소개하고 판매로 연결시켰다. 그에 대한 입소문은 금세 퍼졌고 몸값도 덩달아 뛰었다. 아르바이트 생활 3개월 만에 다른 곳에서 2배 이상의 급여를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영입제의는 이어졌다. “뭐랄까, 장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할까요. 덩달아 인생의 목표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이곳에서 승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거든요.” 그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다른 원단 가게로 옮기면서 마음 한쪽에선 본격적인 창업 구상도 그려갔다.

김기준 동양직물 창업자는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새로운 아이템을 선보이면서 위기를 기회로 반전 시켰다. 배우한 기자
김기준 동양직물 창업자는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새로운 아이템을 선보이면서 위기를 기회로 반전 시켰다. 배우한 기자

 ◇위기는 기회를 불러온다 

새로운 일터에 둥지를 튼 그는 더 바빠졌다. 단순하게 주어진 업무 이외의 자금 관리에서부터 재고물량 확보와 거래처 확대 등을 포함해 핵심적인 가게 운영 흐름까지 틈틈이 기억 속에 저장시켰다.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사장에게 이런 저런 원단을 잡다하게 다 파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양복 원단만을 전문으로 해보자고 건의했습니다.” 근대화로 들어서면서 패션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란 그의 판단은 적중했고 가게 매출 또한 늘었다.

절치부심하면서 그렇게 보내기를 10년. 그는 마침내 1980년 광장시장내 ‘동양직물’로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잘 나가던 그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순탄했던 그에게 첫 번째 고비는 1980년대 중반에 닥쳤다. 대기업들이 원단 사업에 진출하면서다. “대기업들이 원단 분야로 들어오면서 영세한 소상공인들은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30여년 전, 상황을 전한 김 대표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 대표에겐 돌파구가 필요했고 숨겨 놓았던 카드를 꺼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두루마기를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원단의 질이 떨어졌어요. 두꺼운 겨울용 원단이다 보니, 옷 맵시는 나오지 않았어요. 두루마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애를 먹었어요.” 김 대표는 원단 제조 기술자들과 보온성과 착용성까지 가미한 제품 생산에 올인했다. 예상은 주효했고 두루마기는 히트를 쳤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이번엔 한복 자체 수요가 급감했다. “앞이 캄캄했어요. 완전히 새로운 신제품이 필요했으니까요. 근데, 참 희한해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했던 시절, 겪었던 일화가 그 시점에 스쳐가면서 영감을 주었으니까요.”

그의 두 번째 위기 탈출을 도와준 에피소드는 이랬다. 종업원으로 일했던 어느 날, 가게에 들어온 한 노승이 “승복을 지어 입으려고 한다”며 매장 한 켠에 한복 안감용으로 보관했던 원단을 원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팔려 나간 안감은 이내 “질 떨어지는 이런 원단을 어떻게 팔 수 있느냐”는 노승의 핀잔과 함께 돌아왔다. 찜찜하게 환불을 해준 그에겐 “양복에 들어가는 좋은 원단으로 승복을 만들면 얼마나 좋았을 걸”이란 노승의 혼잣말만 들려왔다. 두 번째 경영 위기에 닥친 그는 노승의 조언을 떠올렸고 고품질의 승복 원단 연구에 몰입했다. 그는 전국 사찰에 원단 샘플과 손편지를 써서 보냈고 구매 주문 답장은 쇄도했다.

김기준 동양직물 대표는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고객과의 '신뢰'에 있다"며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롱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배우한 기자
김기준 동양직물 대표는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고객과의 '신뢰'에 있다"며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롱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배우한 기자

 ◇새로운 도전은 계속된다 

그의 노력은 대기업까지 움직였다. 그 동안 승복 원단 제조를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거절했던 대기업조차 그에게 ‘오케이’ 신호로 화답했다. 그는 결국, 대기업에서 생산된 승복 원단의 독점 판매권까지 거머쥐면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양직물을 광장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안착시킨 그는 요즘 가업 승계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대학 졸업 이후, 스포츠 마케팅 분야 진출했던 아들을 설득 끝에 후계자로 앉혔다. 4년 전, 아들에게 사실상 가게를 물려줬지만 아직은 부족해 보인다고 했다. 그래도 본인의 꿈을 접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준 아들이 고마운 듯 했다. “오늘도 지방에 영업을 나갔어요. 저보다 잘하는 부분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새로운 거래선을 발굴하는 측면에선 저 보다 확실하게 나은 것 같거든요.”

오늘날 동양직물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노하우 전수는 중요한 포인트다. “우리같이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기본’을 지키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용이 최우선이죠. 신용은 단순하게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자금 관리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고객이 동양직물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눈 앞의 이익만을 위해서 저렴한 말장난으로 고객을 응대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 손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요.”

칠순을 넘긴 그는 마지막 도전 과제도 제시했다. 현재 B2B로 인식된 원단 사업을 기업과소비자(B2C) 시장으로 전이시켜야만 한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예컨대 승복 사업의 경우엔 직접 사찰에 별도 전시 원단 부스를 마련하고 스님들과 직접 눈높이 마케팅으로 접근하는 형태의 밑그림이다. 최종 소비자들의 실질적인 요구를 제품에 반영하기 위해선 면대면 접촉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B2B에만 안주된 현재 상태에선 사업 확장성은 어렵다고 봅니다. 이젠 원단 사업도 소비자들을 직접 찾아가는 형태로 바뀌어야 됩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또 다른 반전 드라마를 꿈꾸고 있는 그에게선 강한 집념이 전해졌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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