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사이클 조정(mid-cycle adjustment)’을 표방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행진은 제법 화끈했다. 7월과 9월에 이어 10월30일(현지시간)에도 금리를 내려 종전 2%대 중반(2.50%)이던 기준금리 상단을 1%대(1.75%)로 낮췄다. 연준이 3회 연속 금리를 내린 건 앨런 그린스펀 의장 시절이던 1995년과 1999년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연준도 지금처럼 행여 발생할지 모를 경기 하강을 방지하기 위한 ‘보험적 금리 인하’를 정책 명분으로 내세웠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번 금리 인하 결정을 끝으로 당분간 금리를 내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애초부터 2009년 이래 미국 경제의 사상 최장 확장국면을 유지하기 위한 중간조정 작업이었으니, 이제 원래 통화정책 궤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던 20년 전의 성공담이 이번 연준 조치에서도 재연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미국 아닌 다른 나라들은 막 내린 무대 앞 관객이 된 심정이다.
연준의 ‘막간극’ 종료가 누구보다 아쉬운 나라는 한국일 것이다. 대내외 경제적 악재가 산적한 마당에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이던 이벤트가 마무리됐으니 말이다. 연준이 남긴 선물이라곤 2%도 안 되는 기준금리를 올해 두 차례나 내린 한국은행이 다시 한 번 ‘마른 수건’을 짤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는 것 정도다. 파월 의장도 반겼던 미중 무역분쟁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ㆍ브렉시트) 상황의 개선이 그나마 우리의 시름을 덜어주고 있지만, 워낙 정치적 성격이 다분한 사안들이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미국과 달리 우리의 경제 무대는 갈수록 활력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주연을 도맡던 배우들(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선박 디스플레이)이 슬럼프에 빠지거나 이미 노쇠했는데 이를 대체할 신인 배우(신 성장산업)도, 이들을 발굴해야 할 연출자(정부)도 보이지 않는 형국이랄까. 이런 가운데 석유파동,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대형 충격이 없는데도 성장률은 10년 만에 2%를 밑돌 판이다. 더구나 내년에도 별반 다를 게 없으리란 비관론은 늘어 가고 있다.
오랜 기간 선제적 조정 없이 굴러온 이른바 ‘몰빵 구조’가 문제라는 점은 자명하다. 지난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43%가 수출이고, 전체 수출의 21%가 반도체 몫이었다. 국내 반도체의 대부분을 대기업 2곳이 생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2개 회사가 우리 경제의 10%를 책임지고 있다”는 거친 요약도 가능하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세계적 반도체 수요가 폭증한 ‘슈퍼사이클’이었으니, 이 시기 우리나라 성장률(2.7~3.2%) 역시 한 수 접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를 포함한 수출이 중국에 집중된 점(지난해 기준 26.8%)은 또 다른 치명적 구조다. 중국 경제가 대미 무역분쟁과 내수 부진으로 하향곡선을 긋는 통에 올해(1~8월) 우리나라 대중 수출은 지난해보다 18% 가량 줄었는데, 이는 올해 전체 수출 감소분의 절반에 이른다.
무대의 꽃은 배우이고, 경제 무대의 배우는 민간 기업과 소비자다. 그러나 우린 수출 부진에 신음하는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 소비 역시 노후 대비와 소득 양극화, 심리 위축 등에 포위돼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배우들이 무기력하다면 연출자가 막후에서 뛰쳐나와 전면에 나서는 것이 당연지사. 경제 당국이 성장산업을 발굴하고 내수를 촉진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경제부총리가 최근 저성장 고착화라는 ‘뉴노멀’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은 ‘경제 치어리더’ 역할을 망각했다는 실망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배우들도 열린 마음으로 연출자를 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노인 일자리 증가 정책을 ‘예산 낭비’로만 치부하기보단 ‘고령층 소비 여력 확대’ 효과도 감안해 균형 있게 평가해줄 여지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배우에게 신뢰감을 얻고 열연을 이끌어내는 데엔 연출자의 몫이 더 크다.
이훈성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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