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 논쟁이 있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노키즈존 확산으로 어린이와 부모들의 ‘배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우려할 만큼 많은 영업장이 노키즈존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논쟁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리 될 일이었는지, 나와 아이가 즐겨 찾는 카페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많이 왔고, 노키즈존 때문에 외식 장소를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다.
특정 카페나 음식점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허용함’을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카페나 음식점은 아이가 없는 손님의 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이를 동반하지 않는 손님들이 그런 영업점을 찾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오래전부터 나이를 기준으로 출입을 제한한 영업점이 존재했다. ‘나이트클럽’과 같은 젊은이의 장소에는 나이 든 사람의 출입이 금지됐다. 젊은이의 출입이 금지된 콜라텍도 존재한다. 많은 애견카페에서는 애견을 동반하지 않은 사람의 출입이 금지됐다. 특정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배제의 공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새로운 배제의 공간이 생기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의 배제는 노키즈존처럼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나 반려견과 함께 보통의 식당과 카페를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한다고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공간이 세분화되면서 각각의 공간이 갖는 다양성이 증가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그런 다양한 공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아이와 함께라면 아이의 출입이 허용되거나, 아이의 ‘소란스러움’까지도 허용된 장소를 찾고, 아이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아이를 두고 노키즈존 카페에 갈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시장의 존재는 선택의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노키즈존은 문제가 됐을까.
이는 그러한 구분과 배제가 필요나 기호에 의한 것이냐 혐오에 의한 것이냐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필요나 기호’와 ‘혐오’가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논의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살펴볼 수 있다. 노키즈존이 이슈화될 때 우리 사회에 함께 회자된 단어는 ‘맘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공공 질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만을 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맘’이라는 특정 성별과 ‘충’이라는 혐오의 단어가 합쳐지면서 노키즈존 논의의 장에 중심 단어로 등장했다. 노키즈존을 인정하는 것은 선택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를 인정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난 직관적으로 노키즈존의 필요성이나 존재를 인정했지만, 내가 나서서 노키즈존을 인정하기 꺼려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노키즈존의 확산이, 이로 인한 다양한 배제의 등장이, 다름의 인정과 상황에 따른 선택의 확산이 아닌 혐오의 확산, 서로 다른 사람들 간의 반감의 확산, 태생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적정한 선에서 멈추었다.
나는 노키즈존을 원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런 영업장을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자격을 기준으로 출입 여부가 결정되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곳이 원래 자주 갔던 곳이라면 말이다.
며칠 전 아이와 종종 함께 갔던 카페를 가려다 출입문 앞에 붙어 있는 노키즈존 표시에 흠칫 놀랐다. 한 발 뒷걸음질을 치려던 찰나, 표지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노키즈존 표시가 아니었다. ‘NO RUNNING KIDS ZONE.’ 이런 제한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초코를 주문해 놓고 만화책 삼매경에 빠졌다.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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