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에서 실업난 해결, 부패 청산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2주째 계속되면서 사드 하리리 총리가 29일(현지시간) 결국 물러나기로 했다. 하지만 반정부 시위대의 기세는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2011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사설에서 “부패와 종파주의, 시민에 대한 경멸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인 ‘아랍의 봄’ 이후 8년이 흘렀지만 아랍인을 분노케 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레바논 시위는 정부가 왓츠앱 등 스마트폰 메신저 응용소프트웨어(앱)에 하루 20센트(약 230원)의 세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17일 시작됐다. 레바논 시민들은 과도하게 비싼 휴대폰 요금 때문에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메신저 앱 의존도가 높다. 중동 전문 매체 뉴아랍은 “레바논 정부가 정치 권력과 연계돼 불투명하게 부를 축적한 부유층에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 담배와 휘발유 등의 부가가치세를 올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인터넷에 추가 부담금을 매기는 것은 정부가 회복 불능 상태라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만성적인 민생고와 실업난에 고통받던 레바논 시민에게 왓츠앱 세금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민심의 누적된 분노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됐고, 이내 시위 의제는 실업과 부패 척결로 확장됐다. 레바논 정부는 시위 닷새째인 21일 메신저 앱 세금 철회를 선언하고 공무원 급여 삭감, 은행에 대한 자금 지원 등 개혁 조처를 약속했지만 시위대를 진정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외신들은 하리리 총리의 사퇴로 시위대가 잠잠해지기는커녕 레바논 사회의 불확실성만 더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이 하리리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 의회와 논의해 차기 총리를 선임해야 하는데, 레바논의 새 정부 구성은 대개 수개월 이상 걸린다. 레바논은 권력안배주의(confessionalism) 원칙에 바탕을 둔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법률상 대통령은 마론파(가톨릭의 소수종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맡는다. NYT는 “각 종파의 정치적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레바논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 방법이었으나 젊은 세대에게 이는 종파별 추종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해 세력을 영구화하는 방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업가인 카말 만수르는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부패 사회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라며 “나는 그들(지도층)이 마론파든 수니파든 시아파든 상관없다”고 NYT에 말했다.
시위대는 총리 사퇴 소식에 즉각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정치권의 개혁을 더욱 촉구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특히 이번 시위가 ‘신(新) 아랍의 봄’으로 번질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영국 BBC는 “레바논 시위는 무엇보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남긴 미완성 과업의 신호”라고 강조했다. BBC는 “시위대는 2011년 폭정의 지도자들에 대항해 갈망하던 자유를 얻지 못했고 시리아와 예멘, 리비아, 이집트는 오히려 더 강한 경찰국가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며 “성난 젊은층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부패한 정부 때문에 시위대의 분노와 좌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평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