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영상 비공개 전환했지만 사과는 없어
여야 바뀔 때마다 인신공격 ‘내로남불’ 논란 이어져
지난 29일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난데없이 여의도에 소환됐습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홍보용으로 만든 영상은 문재인 대통령을 동화 속 속옷만 입은 무능한 왕으로 묘사해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장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천인공노할 내용”이라고 격분했죠. 한국당은 “현실에 빗댄 풍자물”이라며 문제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논란이 확산되자 30일 영상을 비공개로 돌리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습니다. 대통령을 발가벗긴 영상, 존중 받아 마땅한 정치 풍자일까요, 도를 넘은 조롱일까요.
◇4분23초의 정치풍자, 왜 논란이 됐나요?
해당 영상은 29일 한국당이 개최한 ‘오른소리가족’ 제작발표회에서 공개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소개된 영상은 ‘양치기 소년 조국’과 ‘벌거벗은 임금님’ 등 2편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요, 후자에 등장한 문 대통령 캐릭터가 더 문제가 됐습니다. 문 대통령이 간신들의 말을 믿고 투명 옷을 입은, 속옷 차림의 무능한 왕으로 그려졌는데 풍자의 도가 지나쳤다는 비판이 이어졌기 때문이죠.
문 대통령은 투명 안보자켓을 입은 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가리켜 “저기 저 북 나라에서 나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포를 터뜨리고 있구나”라고 말하고, 투명 경제바지를 입고는 “갑작스런 경제부흥에 놀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라고 합니다. 투명 인사넥타이를 입은 장면에선 수갑을 찬 조국 전 장관의 모습을 보고 “안 그래도 멋진 조 장관이 은팔찌를 차니 더 멋있구나”라고 감탄하죠.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구연자인 할아버지는 “임금은 신하들의 말도 안 되는 선물에 속아 나라의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단다. 정말 바보 같지”라고 했고 아이들은 “바보다, 바보"라고 동조합니다. 국민들은 벌거벗은 채로 즉위식에 등장한 문 대통령에 대해 “신나게 나라 망치더니 드디어 미쳐버렸군”, “즉위하자마자 안보, 경제, 외교, 인사 당 망치더니 결국 스스로 옷을 벗었구만”이라고 비웃습니다.
4분 23초 분량의 짧은 영상은 “이것이 바로 끊이지 않는 재앙, 문재앙이란다”라는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끝이 납니다. 영상 말미에 등장한 ‘문재앙’이라는 말은 극우 보수 성향 사이트 일베(일간베스트) 등에서 문 대통령을 비하하거나 조롱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죠.
◇대통령 모욕 논란, 과거엔 어땠나요?
현직 대통령 모욕 논란을 부른 풍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게 2004년 당시 한나라당 의원극단 ‘여의도’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묘사했던 풍자극 ‘환생경제’입니다. 노 전 대통령을 빗댄 인물 ‘노가리’가 후천성 영양결핍으로 아들 ‘경제’가 죽었는데도 술에 절어 집터 탓을 하며 ‘이사’ 타령만 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도 논란이 일었지만 당시 연극은 “사내로 태어났으면 불X값을 해야지”, “육XX놈, 죽일 놈”, “X잡놈”, "거시기 달 자격도 없는 놈" 등 적나라한 욕설이 문제가 됐습니다. 아무리 연극이라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노골적인 욕설을 퍼부어도 되는지를 두고 비판이 쏟아졌죠.
2017년 표창원 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시국 비판 풍자 전시회에 등장한 패러디 작품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논란의 작품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나체로 잠들어 있고 주사기로 만든 꽃다발을 안고 있는 최순실씨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최순실 뒤쪽의 창문에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이 담겼죠. 하지만 여성 대통령을 나체로 묘사하는 등 성적 모욕을 안겨주는 방식이어서 풍자의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는 비난이 일었습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당시 야당 대선주자였던 문 대통령이 직접 이 그림을 언급하면서 “대단히 민망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유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트위터를 통해 문 대통령은 “예술과 정치의 영역은 다르다”며 “예술에서는 비판과 풍자가 중요하지만 정치에서는 품격과 절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죠.
◇결국 삭제된 영상, 배경이 뭘까요?
또다시 논란의 한복판에 선 대통령 풍자 영상에 가장 먼저 격분한 건 여권이었습니다. 이해식 민주당 대변인은 “문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며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교육용이라면 아동에 대한 인격 침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교재라면 국민 모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도 개인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제1야당이 내놓은 유튜브 콘텐츠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며 “정부와 야당 간에 정책에 대한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상대를 폄훼해선 미래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권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대통령을 속옷 차림으로 묘사해 풍자하는 것은 도를 넘었다’, ‘품격을 훼손했다’는 부정적인 반응이었죠. 보수 야당인 바른미래당은 논평을 통해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 비유하고 풍자하는 것은 도의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비판에 품격을 지키라”고 일침을 날렸고,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도 “아무리 우리 정치가 험해졌다고 하지만 일국의 국가원수를 발가벗기면서까지 조롱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한국당이 역풍을 맞고 국민께 조롱을 받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여야를 불문한 비판이 이어지자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동화 잘못 읽었다고 처벌하면 되겠나. 정부가 듣기 좋은 소리만 듣지 말고 쓴 소리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다”고 두둔하며 진화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논란이 거세지자 꼬리를 내렸죠. 결국 한국당은 30일 홈페이지와 공식 유튜브 채널 ‘오른소리’에서 해당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해 황 대표는 “지금 문 대통령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계속 유지하는 게 옳지 않다고 해서 내렸다”고 밝혔어요.
애도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한국당이 영상을 내린 건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여야 어느 쪽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사실이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야당은 현직 대통령을 향한 원색적인 조롱을 해왔고, 그때마다 우리편이 하면 정치풍자, 상대편이 하면 모욕이라는 내로남불 식 기준을 보여줬습니다. 한국당도 여야가 공수를 바꿔 반복하는 인신공격성 풍자가 오히려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지적에 뜨끔했던 건 아닐까요.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대통령 풍자 수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처럼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조롱으로만 채워져서는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공감대도 얻지 못한다”며 “품격을 저버린 원색적인 공격은 의도가 훤히 읽혀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손효숙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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