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만 되면 광화문, 여의도, 서초동 등 서울 시내 곳곳은 각종 집회와 시위로 몸살을 앓는다. 정말 시끌시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교통 체증으로 불편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끌시끌한 민주주의’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본디 민주주의란 여러 소리가 뒤엉키고 때로는 갈등도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잡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민주주의가 더 위험한 민주주의일 수 있다. 법학도들은 이처럼 왁자지껄한 사회를 두고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표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포섭해서 이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했을까. 주지하다시피 시민들은 전제 군주, 독재 정권, 그 외의 모든 형태의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권력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고안했던 것이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무기는 중대한 정치적 고비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진일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정착된 만큼 이제는 ‘자기 확신의 과잉’ ‘자기 표현의 과잉’을 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강조한 것처럼 각자가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사건의 최종 재판관이 되려는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법치주의(nomocracy)에 의해 조절되고 균형 잡힐 때 비로소 건강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평론가인 파리드 자카리아도 그의 저서 ‘자유의 미래’에서 민주주의가 잘못된 포퓰리즘으로 흐를 경우 야기될 수 있는 폐단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미국 사회가 각 정파와 이익집단의 당파적 목소리에 지나치게 귀 기울이면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고 공동체의 미래에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이슈가 사법의 영역에서 다뤄질 때마다 번번이 정치적 진영 간에 편을 갈라 광장에서 세력 다툼을 펼치는 모습이 일상화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시끌시끌한 것’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끌시끌함이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식의 성격을 띠게 되면 문제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동선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제도다. 하지만 이것이 정도를 넘어 남용되어서 ‘자기 확신과 자기 표현의 과잉’으로 변질돼 버리면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고, 결국 표현의 자유를 통해 시민 전체의 이익을 높이고자 했던 당초의 목적은 뒤흔들리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
이제는 성숙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표현의 광장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먼저 문제된 사안들을 곰곰이 성찰(省察)하고 차분히 숙의(熟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법적 이슈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비록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에 불리하다 해도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팩트와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터키 유소년 축구 경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알마즈베코프라는 이름의 13세 소년은 골문 앞 페널티 지역을 돌파하다 넘어진다. 그러자 심판은 페널티킥을 선언한다. 하지만 소년은 상대 수비수와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판정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공 앞에서 고민하던 알마즈베코프는 골대 밖으로 공을 차버렸다. 의도적으로 실축함으로써 진실과 양심을 선택한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 승리보다 정직한 페이플레이를 선택한 13세 어린 소년의 모습은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김희관 변호사ㆍ전 법무연수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