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출신으로 출산 육아 거쳐 마흔아홉에 장편영화 연출 데뷔
“상처와 고통을 똑바로 인식하는 일부터 치유 시작된다”
82년생 김지영이 울었다. 62년생 김지영도, 02년생 김지영도 같이 울었다. 내 이야기라서, 내 어머니와 내 딸의 이야기라서, 그리하여 평범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서. 그 눈물은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기보다 똑같은 아픔을 함께 겪었다는 공감과 연대에 가깝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관람 후기에서 관객들의 경험담 고백을 유난히 많이 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개봉 다음날인 24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도영(49) 감독은 “주변인들에게서 관람 후기를 전해 듣고 기쁘면서도 슬펐다”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시어머니께서 영화를 보고 우셨대요. 본인 어머니가 생각났다는 말씀에 저까지 울컥하더라고요.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기뻤지만, 한편으로 어머니 세대가 김지영 세대의 이야기에 이입했다는 건 아직 바뀐 게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니까 어쩐지 서글프기도 해요.”
‘82년생 김지영’은 육아와 가사 노동에 지친 30대 경력 단절 여성 김지영(정유미)의 지난날과 오늘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김지영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조명한 조남주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을 각색해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던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서사’로 재구성했다. 남편 대현(공유)과 친정어머니 미숙(김미경) 등 가족과 회사 동료들의 사연까지 풍성하게 보태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거듭났다. 조 작가도 “원작보다 한 걸음 나아간 문제의식을 보여 준다”고 호평했다. 영화는 개봉 5일 만인 27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원작을 읽으며 나는 어디에서 왔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나,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제3의 시선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죠. 그 ‘풍경’들을 영화에 잘 담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악역이 없어야 했어요. 가부장적인 아버지도 그 풍경의 일부니까요. 가족 모두 지극히 평범해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 환경이 지영의 말을 빼앗은 거예요.”
배우들은 영화의 메시지를 놀라운 연기로 표현해 낸다. 인물의 본질에 다가간 정유미, 소신 있는 선택으로 영화에 힘을 실은 공유, 명연기로 뜨거운 감동을 책임진 김미경 등 모든 배우를 일일이 거론하며 김 감독은 “경외심을 표하고 싶다”고 했다.
‘82년생 김지영’은 기획 단계부터 온갖 혐오 공격들을 돌파해 왔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매순간 고민했고, 큰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게 아니라 영화가 나를 선택했구나, 김지영의 이야기가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구나, 내가 연출했지만 내 것이 아니구나… 그제야 마음이 담대해지더군요. 이 영화가 스스로 짊어질 운명을 믿기로 했습니다.”
김 감독은 끊임없이 자문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인가.” 모르는 걸 아는 척 꾸미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주변을 둘러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대사를 쓰고 지우고 다듬었다. 그 과정은 김 감독 스스로 내면의 상처와 대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김 감독은 “상처와 고통을 똑바로 인식하는 일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조남주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들려준 얘기가 있어요. 우리는 모두 식초에 담긴 오이라고. 오이가 아무리 싱싱해도 식초에 담기면 피클이 돼요. 오이가 썩었다고 말하기 이전에 식초를 바라보는 것, 즉 우리가 몸 담그고 있는 문화와 관습을 직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모두 함께 경험을 나누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어요. 제가 영화를 만들며 그랬던 것처럼요.”
김 감독은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숱한 연극 무대를 누볐고, 영화와 드라마에도 종종 얼굴을 비쳤다. 한양대 연극학 석사에 이어 연극학 박사 과정도 밟았다. 틈틈이 단편영화도 만들었다. 첫 아이 임신을 계획하며 잠시 연극을 쉬었던 때 첫 단편영화 ‘가정방문’(2012)을 만들어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진출했고, 박사 과정 중에 만든 두 번째 작품 ‘낫씽’(2014)으로 DMC단편영화페스티벌 관객상을 받았다. 관심이 자꾸만 영화로 기울자 201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대학원)에 영화연출 전공으로 재입학했다. 김 감독은 “전문사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일 것”이라며 웃었다.
지난해 세 번째 단편영화 ‘자유연기’로 미쟝센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휩쓸었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된 배우가 오디션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 자전적 영화다. 시상식 날 ‘82년생 김지영’ 연출 제안을 받았다. 여덟 살과 다섯 살 두 아들을 키우며 연기와 학업을 병행하고 마흔아홉 살에 장편영화 연출 데뷔를 하기까지 김 감독이 거쳐 온 파란만장한 시간들이 김지영의 삶과도 포개진다. 김 감독은 “내게 이런 기회가 오기에 앞서 여성 서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현장에서 실천해 온 동료 영화인들의 존재감을 느끼며 감사해하고 있다”며 “‘82년생 김지영’도 누군가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은 “불필요한 논쟁 대신 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야 “지영의 어머니보다는 지영이가, 지영이보다는 지영의 딸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적 차별 없이, 타고난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 감독과 ‘82년생 김지영’이 꿈꾸는 세상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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