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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받던 그 장소서 사진전 “사람들이 우릴 몰라 외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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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받던 그 장소서 사진전 “사람들이 우릴 몰라 외로웠어요”

입력
2019.10.28 04:40
수정
2019.10.28 15:07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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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영(맨 왼쪽부터), 최양준, 김순자씨가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문 피해를 증언할 때 괴롭지 않냐는 질문에 하나 같이 “수십년간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하는데 간첩으로 몰려 제대로 울지도 말하지도 못했다”고 답했다. 이윤주기자
이사영(맨 왼쪽부터), 최양준, 김순자씨가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문 피해를 증언할 때 괴롭지 않냐는 질문에 하나 같이 “수십년간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하는데 간첩으로 몰려 제대로 울지도 말하지도 못했다”고 답했다. 이윤주기자

“신문사에서 우리 만나러 온다는 얘기 듣고 죄 지은 거처럼 가슴이 벌렁벌렁한 거예요. 그날도 누가 좀 보자고 해서 나갔다가 그렇게 된 거거든.”

최양준(80)씨가 상기된 얼굴로 말문을 연다. 최씨는 1982년 조총련간첩단 사건으로 이듬해 15년형을 선고 받아 8년여를 복역했고, 2010년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74년 울릉도간첩단 사건 피해자 이사영(81·2010년 재심 무죄)씨, 1979년 삼척간첩단 사건으로 온 가족이 누명을 쓴 김순자(74·2016년 재심 무죄)씨도 최씨와 똑같은 표정으로 할 말을 삼키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같은 피해를 겪은 강광보(79), 고 김태룡씨와 함께 31일부터 다음달 17일까지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진치유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를 연다.

22일 서울 불광동 서울혁신센터에서 만난 이들은 “고문 받던 그 자리에 전시회를 연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김순자)고 말했다. “두 번 다시 가기 싫은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간첩 누명을) 알게 될 걸 생각하면 좋아요. 사람들이 너무 몰라서 외로웠거든요.”

세 사람이 사진을 통해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 받게 된 건 2015년 무렵부터다. 조작간첩 피해자를 위한 비영리 인권단체 ‘지금 여기에’가 사진치유자인 임종진(50) ㈜공감아이 대표에게 강연을 의뢰하면서 네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임 대표는 “프로그램에서 카메라를 드는 목적은 사물을 마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의 공간, 기억과 마주하기 위한 도구로 렌즈가 쓰이죠. 동시에 카메라가 표현의 도구라서 찍고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가 성취감을 줍니다.”

임 대표는 “어르신들의 공통점이 일상을 찍은 사진 중 TV화면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라며 “동물원, 초원, 외국 명소 같은 당신들이 못 가는 곳들을 담은 TV화면이 많다”고 덧붙였다.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수감, 보호관찰로 수십 년을 억압받으며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고, 이런 억눌린 감정이 TV화면을 찍는 행위로 표현됐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프로그램 시작 후 반년 간 이들은 일상을 사진으로 찍고, 행복한 기억을 쌓을 공간을 함께 다녔다.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가졌을 원감정(인간이 누리는 기본적인 감정)을 회복하는 훈련이다. 김순자씨는 “서울에 살아도 먹고 살기 바빠 남산타워를 못 가봤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남산타워, 63빌딩을 가보고 한강유람선도 처음 타봤다.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주니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김순자씨가 찍은 남영동 대공분실 계단. 첫 방문 때 카메라를 들지 못했던 김씨는 몇 번의 방문을 거쳐 렌즈에 계단 전체를 담았다. 공감아이 제공
김순자씨가 찍은 남영동 대공분실 계단. 첫 방문 때 카메라를 들지 못했던 김씨는 몇 번의 방문을 거쳐 렌즈에 계단 전체를 담았다. 공감아이 제공
옛 안기부 터에 자리잡은 서울 이문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하에서 찍은 창문 사진. 이사영씨는 40여년 전 고문받던 안기부에서 본 풍경이 이와 같았다고 설명했다. 공감아이 제공
옛 안기부 터에 자리잡은 서울 이문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하에서 찍은 창문 사진. 이사영씨는 40여년 전 고문받던 안기부에서 본 풍경이 이와 같았다고 설명했다. 공감아이 제공
최양준씨가 북악산을 찍은 전경. 1980년대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감옥 창문을 통해 바라본 북악산 풍경이 꼭 이 모습이었다. 이제는 직접 오를 수 있다. 공감아이 제공
최양준씨가 북악산을 찍은 전경. 1980년대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감옥 창문을 통해 바라본 북악산 풍경이 꼭 이 모습이었다. 이제는 직접 오를 수 있다. 공감아이 제공

이후 서대문형무소, 남영동 대공분실 등 ‘아픈 장소’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이사영씨는 “처음에는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가슴이 떨렸다. 여러 번 찾아가니 그런 마음이 없어졌고, 이제는 덤덤하다”고 전했다. 사업차 한국과 일본을 오갔던 이씨는 74년 겨울 이문동 안기부로 끌려가 일주일 간 고문 받고, 허위 자백해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로 바뀐 건물 지하에서 바깥 풍경을 찍으며, 40여년 전 형무소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빛을 떠올렸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처음 찾던 날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했던 김순자씨(“나 뿐 아니라 아버지, 동생도 다 같이 고문 받은 기억, 그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지요”)는 사진 치유 프로그램 마지막 무렵, 서대문형무소 사출시설을 찍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버지 김상회씨가 1983년 외롭게 생을 끝낸 곳이다. 5년형을 선고 받고 대전교도소에 복역하던 딸 김씨는 부모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1982년 부산보안대에 끌려가 한달 간 전기고문, 통닭구이, 손톱 밑 대바늘로 찔리기, 구타 등 온갖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을 했던 최양준씨는 고문 장소를 찍어보라는 주문에 수강생 중 가장 격렬히 반대했다. 최씨는 “두려움이 있었다. 대공분실이나 이문동처럼 건물이라도 남아있으면 했는데, 부산보안대는 그 사이 세 번이나 바뀌어 건물도 없었다”고 말했다. 병무청으로 바뀐 옛 부산 보안대를 찾아 사정을 말하고 허허벌판으로 바뀐 취조실 터를 찍고 자존감을 회복했다. 임 대표는 “부산을 다녀오신 후 다른 형무소들을 ‘휘젓고 다니시며’ 카메라에 담았다”고 말했다.

임종진 대표는 “70,80년대 조작간첩 피해 사건은 구심체가 없고 전국에 흩어져있다. 억울했소를 반복해야 세상이 관심을 갖고, 늘 조명은 과거에 집중된다. 오늘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 이들의 기운으로 전시장의 암울한 기운을 덮어버릴 것”고 말했다. 박형기 인턴기자
임종진 대표는 “70,80년대 조작간첩 피해 사건은 구심체가 없고 전국에 흩어져있다. 억울했소를 반복해야 세상이 관심을 갖고, 늘 조명은 과거에 집중된다. 오늘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 이들의 기운으로 전시장의 암울한 기운을 덮어버릴 것”고 말했다. 박형기 인턴기자

치유에 방점이 찍힌 전시회인 만큼 이들의 일상, 행복한 한 때를 담은 사진도 함께 선보인다. 행복을 찍어보라는 주문에 김순자씨는 손주들을, 이사영씨는 먼저 간 부인의 납골당을 찾은 자신의 거울 속 모습과 새로 만난 여자친구를 찍었다. “얼마 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철 전 의원을 만났을 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를 잊어버렸었다고. 그런 분도 잊고 사는데 다른 분들은 말할 것도 없죠. 나는 이 전시가 ‘사회에 대한 나의 고발이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나한테 얼마나 잘못했는가를 알리는 것이 소중해요.”(이사영)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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