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대미 담화에 깜짝 등장… “북미, 실질 진전 없고 여전히 교전 관계”
“대북 적대시 정책 더 매달리는 美, 친분 내세워 연말 넘기려 한다면 망상”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조미(북미) 수뇌(정상)들 사이의 친분관계는 민심을 외면할 수 없다.”
북한이 더 이상 자신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서두르라고 미국에 경고했다. 초기 북미 협상을 이끌었던 대미 강경파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앞세워서다.
27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부위원장은 이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발표한 담화에서 “최근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과 아량을 오판하면서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에 더욱 발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며 “미국이 자기 대통령과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과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내세워 시간 끌기를 하면서 이해(올해) 말을 무난히 넘겨보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망상”이라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얼마 전 유엔 총회 제74차 회의 1위원회 회의에서 미국 대표는 우리의 자위적 국방력 강화 조치를 걸고 들면서 미조(미북) 대화에 눈을 감고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느니, 북조선(북한)이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해야 한다느니 하는 자극적인 망발을 늘어놓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유엔 제재 결의 이행을 집요하게 강박하고 있으며 추종 국가들을 내세워 유엔 총회에서 반(反)공화국 결의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각방으로 책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미 전략사령관 지명자가 최근 의회 상원에서 북한을 ‘불량배 국가’로 헐뜯었고 미 군부가 북한을 겨냥한 핵 타격 훈련까지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 관영 방송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앞서 24일(현지시간) 찰스 리처드 미 전략사령관 지명자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인준청문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현재 배치된 지상발사요격미사일(GBI) 규모가 북한과 같은 불량 국가들의 잠재적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적절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불량 국가들의 제한된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할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답한 바 있다.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김 부위원장은 “제반 상황은 미국이 셈법 전환과 관련한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를 고립 압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북미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 관계 덕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라며 “조미 수뇌들 사이의 친분 관계는 결코 민심을 외면할 수 없으며 조미 관계 악화를 방지하거나 보상하기 위한 담보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조미 관계에서는 그 어떤 실제적인 진전이 이룩된 것이 없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불과 불이 오갈 수 있는 교전 관계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벗도 없다는 외교적 명구가 영원한 적은 있어도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격언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고 달래기도 했다.
북한이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대미 협상에서 빠진 김 부위원장을 다시 대미 메시지 스피커로 내세운 건 의외다. 군부 출신 강경파이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초기 북미 협상을 이끈 북한 측 고위급 당국자인 만큼 아태평화위 위원장 명의로 정상 간 친분을 떠받칠 수 있는 북미 간 근본적 관계 개선 필요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아태평화위는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조직으로 북한이 미국 등 미수교국이나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 활용해온 창구다. 김 부위원장은 당 대남 담당 부위원장이자 통전부장으로 아태평화위 위원장을 겸임해왔는데, ‘하노이 노 딜’ 뒤 권력 집단 재편 과정에서 통전부장을 장금철에게 넘겨준 뒤에도 이 직책은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날 담화로 확인됐다.
대미 유화ㆍ강경 메시지의 효과적 발신을 위해 김 위원장이 원로급 인사인 김계관 외무성 고문과 함께 ‘굿 캅’(선역)과 ‘배드 캅’(악역)을 나눠 맡겼을 가능성도 있다. 앞서 김 고문은 24일 낸 담화에서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과 상호 신뢰를 다시 강조하면서 “우리는 미국이 어떻게 이번 연말을 지혜롭게 넘기는가를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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