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인 인도법(송환법) 반대 시위를 촉발한 여자친구 살인 용의자 찬퉁카이(陳同佳ㆍ20)를 볼모로 대만과 홍콩, 중국이 노골적인 ‘정치 흥정’을 벌이고 있다. 내년 1월 대선을 앞두고 표심을 장악하려는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 늦었지만 민주화 시위의 불쏘시개를 떨쳐 내려는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 일국양제(一國兩制ㆍ한 국가 두 체제)의 확실한 본보기를 보이려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간 이해관계가 얽힌 탓이다. 당초 각국이 명분으로 내세운 사법정의는 뒷전이고 정치적 셈법이 난무하면서, 죗값을 치르겠다고 자수를 선언한 용의자가 오히려 머쓱한 처지다.
내년 재선을 노리는 차이 총통은 사법절차에 따른 용의자 신병인도를 통해 주권을 수호하는 투사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각인시키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가라고 역설해 온 그의 노선과도 맞아떨어진다.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이만한 호재가 없다. 홍콩이 거부해도 대결구도가 부각된다면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게임이다. 사법경찰관을 보낼 테니 홍콩이 먼저 기소해 신병을 대만으로 넘기라며 우격다짐으로 떼를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홍콩은 속지주의를 채택해 대만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 관할권이 없다. 타이베이타임스는 24일 “홍콩은 수배 중인 범죄자가 가방을 메고 제 발로 돌아다니도록 놔두지 말고 당장 붙잡아 대만으로 보내야 한다”는 차이 총통의 발언을 전했다.
하지만 대만 내부에서도 “속 보인다”는 비판이 커지자 일단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대만 내정부는 “찬퉁카이가 진정 대만에서 처벌을 받으려 한다면 입경 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중국 업무를 담당하는 대륙위원회는 “자유롭게 들어올 방법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쉽게 빗장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다. 찬퉁카이 측은 “출소와 동시에 대만으로 가려 했는데 입국을 불허해 무산됐다”고 밝혔다.
이에 맞선 홍콩은 대만의 요구대로 끌려가다간 송환법의 악몽을 되풀이할 처지다. 23일 찬퉁카이 석방에 맞춰 송환법 폐기를 선언한 마당에 사법공조를 통해 그를 다시 대만으로 돌려보낸다면 사실상 송환법 부활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5일 ‘복면금지법’ 시행 이후 규모가 줄어든 시위대를 다시 자극해 사태가 커질 수도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24일 “홍콩 정부가 진작에 찬퉁카이가 대만으로 가서 자수하도록 설득했다면 이처럼 5개월째 시위가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람 장관이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홍콩 시위대는 “찬퉁카이에 대한 법적 처벌과 별개로 민주화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공언한 상태다.
중국은 시 주석이 지난 13일 “중국 영토를 분열시키려는 자는 몸이 부서지고 뼈는 가루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상황에서 대만이 ‘국가 대 국가’ 관계인양 사법절차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못마땅하다. 일국양제 원칙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24일 “차이 총통이 정략적으로 이번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며 “대만 사법기관은 홍콩에서 법을 집행할 권리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 “차이 총통과 집권 민진당은 홍콩 시위와 혼란을 부추겨 재미를 보더니 내년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정치적 계산에만 매몰돼 있다”고 지적했다.
찬퉁카이는 지난해 2월 대만에서 함께 여행 중이던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하고 홍콩으로 도망쳤다. 이후 살인죄가 아닌 절도와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만 기소돼 29개월의 징역을 선고 받아 옥살이를 하다가 모범수로 11개월 감형돼 23일 출소했다. 당초 홍콩 정부는 그를 대만으로 보내 처벌하기 위해 송환법 제정을 추진한다고 설명했지만, 중국의 개입을 우려한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에 불을 지피면서 6월 9일 103만명이 운집한 집회를 시작으로 20주째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베이징=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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