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레스토랑은 봉건제의 혁파에서 시작됐다. 흔히 프랑스혁명과 레스토랑의 발달을 연결 짓는 것도 그 이유다. 왕의 전속 요리사들이 거리로 나와서 식당을 차렸다. 부르주아들은 요리사를 집으로 부르는 대신, 식당으로 가서 시중을 받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시종이 입으로 부르는 ‘오늘의 메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벽에 붙여 놓거나 종이에 써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단 한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가 메뉴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메뉴(판)는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현대 한국의 식당에서도 당연히 볼 수 있다. 부르주아들은 식당을 새로운 사교의 장으로 삼았다. 집으로 손님을 불러 여는 ‘가든파티’도 있었지만, 마차를 타고 시내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타인과 교양을 겨루어보는 신종(?) 문화가 생겨났다.
반면 이 땅에서 레스토랑은 각국(세계를 뜻하는 과거 용어) 주재 인사들이 정보를 나누고, 고국의 음식을 먹는 현장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개항해 서양요리를 배운 상하이 출신 중국인 요리사들이 주방을 맡았으리라 짐작한다. 조선의 식당은 사교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여전히 선비와 관료들은 사랑채를 이용했다. 나중에 조선 왕가에서 왕의 식탁과 잔치를 주관하던 관리가 광화문 네거리에 조선 최초의 요릿집을 차렸지만, 사대부들이 찾는 곳은 아니었다. 주로 조선을 경략하기 시작한 일제 관료들과 사업가들, 여기에 빌붙은 조선인들의 술자리가 벌어졌을 뿐이라고 역사는 추정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술버릇 대단했던 수주 변영로(1897~1961)가 그 요릿집의 주인을 하찮다 하여 들이받는 사건도 있었다(‘명정사십년’).
그렇지만 거리에는 맛있는 밥집이 생겨나고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미 식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장국밥, 설렁탕집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체 있는 사람들’이 그런 곳에 나타나는 건 남우세스러운 일이었다. 추레한 행색의 노동자들과 나란히 앉아 ‘겸상’ 비슷하게 설렁탕을 먹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는가. 그때 돈 있는 집, 양반가의 하인들이 솥을 들고 탕을 받으러 오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런 불편을 없애준 것이 배달이었다. 누구나 배달을 시켜서 탕국이며 요리를 받아먹을 수 있게 됐다(‘배달을 시키다’란 관용 문장이 생겼다). 식당과 가옥이 몰려 있고, 점방들이 많았던 청계천 일대에서는 배달이 크게 성행했다. 냉면과 설렁탕, 장국, 떡국에 청요리에 나중에는 우동과 메밀국수까지 배달부가 날랐다. 당시 소설과 신문에는 배달을 시켜먹고 식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나 배달부가 구속됐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전화가 있는 규모 있는 집들은 일제강점기 무렵 돈을 크게 벌었다. 배달 전화가 요긴했다. 상대방도 전화를 쓴다는 것은 꽤 값나가는 배달 주문이었을 것이다. 전화가 없는 집은, 하인이든 누구든 인편으로 배달을 요청했다(참 불편도 해라). 어쩌면 그 시절에 이미 배달의 맛을 우리는 즐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차리고 입고 식당 가는 것보다 누가 가져다주는 밥맛의 즐거움을 알지 않았을까. 초기의 배달은 쟁반에 그릇을 담거나 보자기로 싸서 들고 뛰었다. 자전거가 대중화되면서 한 어깨에 쟁반을 겹겹이 쌓아 메고 한손으로 묘기 부리듯 자전거를 모는 배달부들이 거리를 누볐다. 나무로 짠 배달통을 처음 쓴 것은 아마도 중국집이었다. 한식은 쟁반, 중식은 배달통이라는 분류는 지금까지도 맥을 이어오고 있는 걸 보면.
이제 우리는 진정한 배달의 시대에 산다. 온갖 음식과 상품이 배달된다. 20대 산업재해의 절대 다수가 배달업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거리에서 그들의 질주를 보고 있노라면, 이를 악물고 목숨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 배달앱을 깔지 않았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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