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의존 정책 잘못” 독자개발 추진, 아버지 김정일 정책 정면 비판
남북관계ㆍ평화경제 구상 빨간불… “南과 합의해 철거” 여지는 남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지구를 현지 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대인 김정일 정권의 대남의존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금강산에 조성된 남측 관광시설의 철거를 지시했다고 북한 관영매체들이 23일 보도했다. 금강산 관광은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합의해 1998년 시작된 사업으로, 남북 화해ㆍ협력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런데 김 위원장이 선대인 아버지의 업적을 부정하면서까지 독자적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남북 경제협력 전망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이날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현대아산이 금강산 일대에 조성한 고성항과 해금강호텔, 금강산호텔, 금강산 옥류관 등 관광 시설을 둘러봤다. 김 위원장은 “건축미학적으로 심히 낙후”, “건설장의 가설건물을 방불케 하는” “자연경관에 손해” 등의 표현으로 이 시설들을 혹평했다. 그러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고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과거 정권의 업적을 ‘선대의 유훈’이라고 떠받들던 오랜 원칙을 깨고, 이례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이자 선대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의 정책을 정면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하여 금강산이 10여년간 방치되어 흠이 남았다고, 땅이 아깝다고,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며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금강산에 남녘동포들이 오겠다면 언제든지 환영할 것이지만 우리의 명산인 금강산에 대한 관광사업을 남측을 내세워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대해 우리 사람들이 공통된 인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강산 시설 철거’라는 초강수 발언에는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 당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우선 정상화를 약속해놓고 대북제재 등을 이유로 약속 이행에 소극적인 우리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남북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등 한반도 평화와 경제 협력이 선순환하는 평화경제 기반 구축에 힘쓰겠다”고 한지 하루 만인 23일 북한이 남북경협의 핵심 상징을 건드린 것에도 북한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에 남북경협으로 남북관계와 북미 비핵화 협상을 견인하겠다는 정부의 구상이 흔들릴 가능성이 커졌다.

청와대와 정부는 “북측의 의도와 구체적인 사실관계 파악이 먼저”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적잖게 당황한 분위기다. 외교 소식통은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마지막 돌파구로 여긴 것이 금강산 관광”이라며 “북한이 그 싹마저 잘라버린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정부 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하면서도 ‘남측의 관계 부문과 합의해’라는 표현을 쓰며 대화 여지를 내비쳤다”며 비관적 전망을 차단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대북 제재와 남북 경색 국면의 장기화에 대비해 김 위원장이 금강산에서 남한 흔적 지우기를 하고 있다”며 “금강산 남한 시설 철거 문제로 남북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해빙으로 연결되긴 어려울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지지도에는 장금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김여정ㆍ조용원ㆍ리정남ㆍ유진ㆍ홍영성ㆍ현송월ㆍ장성호를 비롯한 당 간부,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마원춘 국무위원회 설계국장 등이 수행했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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