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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토록 가벼운 죄

입력
2019.10.24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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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인권'은 취사선택 되어 존중 받는다. 그것이 우리의 법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인권'은 취사선택 되어 존중 받는다. 그것이 우리의 법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23세 남성 손모 씨(유감스럽게도 그의 실명과 얼굴이 우리나라에서는 공개되지 않는다. 신상정보 공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토록 디테일한 인권 존중의 취사선택이라니!)는 ‘아동 성착취 영상물 사이트’를 운영하며 전 세계에서 회원을 모아 비트코인을 받는 식으로 4억원 이상의 범죄 수익을 얻었다. 그가 운영한 사이트에는 25만 건의 불법 영상이 유통되었는데, 사이트 운영자인 손씨는 메인 배너에 성인 영상은 올리지 않도록 공지하여 해당 사이트가 아동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32개국이 공조한 수사로 업로드는 물론 단순 소지자까지 300명이 넘는 성인 남성이 검거되었으며, 그중 한국 남성이 200여명이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영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몇몇 아동이 구출되기도 하였지만 상당수 피해자는 아직도 행방불명 상태라고 한다. 영상은 10대 청소년에서부터 2~3세로 보이는 유아에까지 성인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영상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어떤 영상에는 신체가 절단되는 피해자가 있다고 하니, 이 죄의 끔찍함과 참혹함을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이토록 역겨운 범죄를 저지른 손모씨는 그래서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2심에서 무려(!)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1심은 집행유예였다. 집행유예 기간에 결행한 혼인신고를 통해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형의 참작을 받았다는 게 이 판결의 작은 포인트라면 포인트다. ‘처음 적발된’ 초범이라는 것도 감형에 한몫을 했다. 그는 곧 출소하여 사회에서 인터넷도 하고 스마트폰도 만지작거리며 살 것이다. 그밖의 사용자들은 대부분 벌금형을 받아 그런대로 일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들에게는 아청법이라 불리는 ‘아동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다. 그들과 같은 부류가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는 ‘선처를 받는 법’, ‘형량을 줄이는 법’에 대한 공유가 활발하다.

모든 일에 처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이렇게나 약한 처벌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아동 성범죄와 불법 촬영, 성폭행과 성희롱 등 주로 여성이 피해자가 될 범죄의 ‘가벼움’이다. 가벼운 죄를 저질렀으니 이런저런 감형 사유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추상 같은 법에 의하면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까지 처할 수 있게끔 되어 있지만, 이런 정도로는 그 정도까지 처벌을 내리기 애매한 것이다. 우리의 법이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가 그런 것이다. 우리의 법은 성범죄에 노출된 아동을 보호할 의지가 별로 없다. 대신 우리의 법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이라 불리는 남성의 처지에 공감한다. 우리의 법은 불법 촬영물의 피사체가 되어 버린 피해자의 고통과 인권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대신 우리의 법은 수십 번 불법 촬영을 거듭하다 한 번 (재수 없게) 걸려 초범이 되어 버린 남성의 앞날을 크게 걱정한다. 인권은 취사선택되어 존중받는다. 그것이 우리의 법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미국 시민 니콜라스(미국 정부는 그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남성이 다수 포함된 337명의 범죄자 실명을 모조리 공개했다. 손모 씨의 이름이 궁금하면 외신을 참고하면 된다.)는 손 씨의 사이트에서 영상을 다운받은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회 접속, 1회 다운로드의 혐의가 있는 리처드는 징역 5년 10개월이다. 이 극심한 격차가 아연하다. 그들에게는 무겁고 우리에게는 가벼운 죄.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 인터넷에는 이토록이나 가벼운(?) 불법 영상이 이리저리 옮겨지고 저장되어 퍼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여도 괜찮다면, 나는 도무지 괜찮지 못하니, 이만 빠지고 싶다.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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