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간 정통 외교관으로서, 제5공화국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과 국무총리로 격동의 80년대를 보낸 노신영 전 총리가 숙환으로 21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전두환 신군부’ 멤버가 아니면서도 정권 내내 중용되며 한국 외교·안보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고, 총리 시절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노-노 체제’를 이루며 5공 정권의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기도 했다.
1930년 평안남도 강서 태생으로 19세에 월남한 실향민인 노 전 총리는 고구마 장사를 하며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 고시행정과 3부(외교)에 합격해 1955년부터 외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78cm의 큰 키와 남다른 업무추진력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은 없었지만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시절, 1980년 5공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외무부 장관에 발탁된 이후 안기부장(현 국가정보원장), 국무총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시 출신 첫 외무부 장관, 외교관 출신 최초의 안기부장으로 대한민국 외교ㆍ안보사에 큰 획을 그었다. 정통성 시비에 휩싸인 신군부 정권과 미국 레이건 행정부와의 관계 정상화에 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1982년 12월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석방됐다. 당시 노 전 총리는 미국 정부와 협의해 김 전 대통령의 미국행을 극비리에 주선했다.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최대 규모의 양국 경협협정을 추진했고, 1983년 40억 달러의 경협자금 협상을 타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3년 발생한 아웅산 테러,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의 수습을 이끈 것도 고인이었다. 2000년 내놓은 ‘노신영 회고록’에선 당시 미국 측이 순방기의 항로 우회를 권해 비행이 1시간30분 더 걸려 아웅산 묘소 참배가 하루 순연되면서 테러 피해가 그나마 줄었다는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한때 전 전 대통령이 후계자로 꼽기도 했지만 군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승승장구하던 고인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자 정치적ㆍ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32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고 “다시는 국민 세금을 받지 않겠다”며 주변의 정계 입문 권유도 마다했다. 2년 3개월간 총리직을 수행한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국무총리(2년 4개월) 이전까지 최장수 총리였다. 이후 민정당 고문을 지냈으며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권유로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고인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발탁한 ‘멘토’로도 유명하다. 1970년대 초대 주인도대사로 부임되자 반 전 총장을 서기관으로 데려갔고, 1985년 총리로 취임했을 당시엔 미국 연수중이던 반 전 총장을 의전비서관에 임명했다.
고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의 애도가 이어졌다. 반 전 총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 외교의 큰 별이 지셨다”며 “스승 같은 분의 서거에 슬픔을 누를 길이 없다. 남은 자들이 고인의 유산을 물려받아 더 아름답게 만들자고 다짐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방일 중인 이낙연 총리도 “고인이 외무장관과 총리로 일하셨던 기간에 저는 담당기자였다”며 “고인은 능력과 경륜의 공직자였다”고 말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도 “노 전 총리의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국제인권운동의 꿈을 키워왔다”며 “당신이 배출하신 수많은 제자들이 대한민국 요소요소에 뛰고 있다. 다시 한 번 추모의 마음을 올린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경수(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철수(아미커스 그룹 회장)씨와 은경, 혜경씨가 있다. 부인인 김정숙 여사는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병원 발인 25일 대전현충원. (02)2072-2091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