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3>거리의 치유자 정혜신
“설리의 죽음, 그저 우울증으로 재단 안타까워…
“진료실 밖으로 나오자, 환자 아닌 사람이 보였다”
이메일 한 통이 길을 바꿨다. 의사에서 치유자로.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이른바 잘 나가는 정신과전문의였다. TV에도 종종 얼굴을 드러냈고, 책도 썼으며, 언론에 칼럼도 기고했다. 그러니 그의 병원을 찾는 사람도 많았을 터다. 그 시기 그는, 그러니까 그저 의사였다.
2004년쯤 재단법인 진실의 힘의 송소연 상임이사(당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총무)가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 분이면 도와줄 수 있을 거야’란 기대 반, ‘정말 도와줄까’란 불안 반으로. 송 상임이사는 ‘진도 간첩조작 사건’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고문 피해자 박동운씨의 재심을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 서기 이전, 박씨의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게 먼저인 걸 깨달았다. 그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간곡한 요청을 송 상임이사가 이메일에 담아 보낸 거다. 장문의 편지를 읽고 그는 곧장 전화했다. “할게요.”
박씨를 시작으로 잇따라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만났다. 진료실을 벗어나 처음 맞닥뜨리는 트라우마 현장이었다. 이후로 그의 보폭은 더욱 넓어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그는 평범한 이들에게 치유의 힘을 전파하고 있다. 1년 전 낸 책 ‘당신이 옳다’가 그 교범이다. 지금까지 21만부가 넘게 팔렸으니, 이 열풍이야 말로 “일상이 가장 치열한 전쟁터”라는 그의 말을 가장 잘 증명한다.
책을 내고 1년간 그는 “울릉도만 빼고 안간 곳이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전국을 돌았다. 그간 했던 강연이 150회 남짓이다. 올해 8월 한 달 휴식기를 가진 걸 제외하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집 밖을 나선 셈이다. 그의 강연은 말하자면, ‘심리적 CPR’ 교습이다. 마음에 하는 심폐소생술을 알리는 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 책을 추천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 강연 요청이 쇄도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실 알리려고 쓴 책이에요. 현장이 좋았기 때문에 다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죠. 하지만 심리적 CPR을 알리는 데 글이 가장 효과적이니 어쩔 수 없이 쓴 거예요. 책을 도구로 삼은 거죠. 그래서 이 책은 가성이 없는 거친 육성의 책이에요.”
치유자 정혜신(56)씨를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설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아이돌 가수 겸 배우 최진리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인 15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매니저가 마지막 모습을 발견하는 생을 살아야 했던 고인을 그는 애달파했다.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을 그저 우울증이라는 정체 모를 세 글자의 단어로 치환하는 걸 몹시 안타까워했다. 스스로 목숨을 극단에 이르게 할 정도로 아팠는데, 그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 받을 단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애통해 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떤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힘든 거니”라고. 나에게 마음을 포개어 집중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사람은 살기에. 그가 트라우마 현장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증명 받은 진실이다.
◇숱하게 마음에 찔리는 비수
-요즘도 많이 바쁘게 지내시죠.
“주위에서 바쁘겠다고 그러는데, 별로 그런 느낌 없이 지냈어요. 객관적으로 보면 일정이 많기는 하지만, 주관적으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여유롭게 다녔죠.”
-마음이 여유로웠다는 거군요.
“그 시간들이 좋았거든요. 사실 그거(강연)하려고 책을 낸 거니까요. 심리적 CPR 워크숍이죠. 어느 강연에 갔더니 한 분이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다급하게 외치는 것 같았다고 표현을 하더군요. 진짜 할 말이 있어서 쓴 책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것 때문에 그렇게 다급한가요?
“일상이 가장 치열한 전쟁터이니까요. 일상에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비수에 찔리고 있죠. 눈에 보이는 칼이라면 피가 나니 지혈하고 응급처치를 할 텐데, 심리적으로 칼을 맞으면 자각도 못한 채 스러져가죠. 매일 일상에서 사상자가 속출한다고 느껴요. 그러니 마치 외국어 번역하듯 마음의 이야기를 번역해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야 피하니까.”
-오래 트라우마 현장에서 많은 이들의 치유를 도왔는데요, 2004년쯤 송소연 상임이사가 보낸 이메일이 시작이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박동운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법적으로 이 분의 억울함을 푸는 것과 별도로 국가폭력이 헤집어 놓은 이 분의 마음을 치유해야 할 것 같다면서 만나줄 수 있느냐는 간곡한 내용이었어요. 바로 하겠다고 했죠.”
당시 송 상임이사는 이메일에 자신은 누구인지, 민가협은 어떤 단체인지, 고문 피해를 입은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상세하게 썼다고 기억했다. 군데군데 밑줄도 긋고 글씨색도 바꿔가며.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까지 말이다. ‘선생님들에게서 똑 같은 증상을 확인해요. 우리 선생님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아니면 한번 상담이라도 해주세요.’ 맨 마지막엔 민가협의 전화번호를 가장 큰 글씨로 남겼다. 그날 바로 “저는 정혜신이라는 사람이에요”란 전화가 왔다. 그 때 심정을 송 상임이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이고, 우리 선생님들 이제 살았네.’
-그 이메일을 읽고 어떤 마음이었나요.
“그 전까진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대면한 적은 없지만 그런 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그런데 실제 그들을 도울 제안이 왔으니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나서 바로 박 선생님을 만났어요.”
-만나니 어땠나요.
“가방에서 본인이 간첩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증거가 될 서류들을 꺼내시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거 다 필요 없다고요. 선생님이 어떤 고통을 겪었을 지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그간 어떤 세월을 보내셨냐고요. 그렇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죠.”
박동운(74)씨는 국가권력이 고문으로 조작한 가족간첩 사건으로 죄도 없이 17년 5개월이나 형을 살았다. 2009년 11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끌려간 지 2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 받았다. 반 토막 난 인생이 그런다고 보상이 되겠나.
-재심 전이니, 무죄를 받을 수 있는 서류들을 다 모으고 있었던 거군요.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법적으로 증명하는 게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그저 선생님의 삶이 어땠는지, 그런 삶을 살면서 마음은 어땠는지 하는 대화를 시작했죠. 자신의 얘기를 다 하려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아야 해요. 그러니 내게서 선생님이 안전함을 느끼도록 하는 게 중요했어요. 자신의 얘기를 온전하게 다 할 수 있으면 사람은 자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돼요. 그렇게 만난 첫날 서류를 다 내려놓고 얘기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국회 청문회(2005년 9월 국가보안법 청문회)까지 가게 됐죠.”
박씨를 비롯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 상담이 그렇게 발을 뗐다.
◇필터 없이 육안으로, 환자 아닌 사람으로
-의사보다 치유자라는 말을 더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시기와 관련이 있겠지요?
“그렇죠. 어떤 한 에피소드만으로 그런 건 아니에요. 그걸 시작으로 수년 동안 (트라우마 현장에서) 굉장히 많은 분들을 만났어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같지만 진료실과 일상은 달랐죠. 이를 테면, 병원에서는 아주 정교하고 해상도 높은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봤다면, 현장에서는 어떤 필터도 없이 육안으로 만나는 거예요. ‘내가 사람을 만나는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굉장히 큰 차이였어요.”
-렌즈를 통해서 보지 않는다는 건 어떤 건가요?
“렌즈가 사람을 왜곡 시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료실에서 (환자를) 바라볼 때는 계속 머릿속에서 어떤 병명일까 생각하죠. 의사로서 그렇게 트레이닝 받았으니 내가 가진 지식의 틀 안에서 감별을 하려고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진단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좁혀가거든요. 그런 게 필터였어요.”
그는 좀더 깊이 들어갔다. 말이 빨라지고, 그가 전해준 어느 청자의 표현처럼 다급해졌다.
“그런데 세상은 이 틀이 전문가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추어올리죠.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사회적 권력이 됐고 그게 점점 강화됐어요. 언론도 그런 전문가의 목소리를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용하죠. 그러니 이제는 일반인들도 예를 들어 친구가 회사에서 따돌림을 당해 혼자 지내고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혹시 우울증 아니냐고 하죠. 약 먹으면 괜찮아진다고요. 왜 고통을 우울증이라고 말할까요. 고통스럽고 힘들어 하는 내 친구한테 우울증이라고 말하는 건, 그러니 병원에 가보라는 얘기죠. 그게 아니라 내 친구의 고통을 공감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분노해줘야 해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냥 ‘우울증인가 봐’ 하면 기운 빠지죠.”
-진료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위축도 있을 거고요.
“진료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암묵적으로 항복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의사한테 ‘해도 해도 안 돼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살려주세요’하는 거죠. 그러니 굉장히 불평등한 관계예요. 진단 체계나 의료 시스템이 사람을 심리적으로 누르는 폭력으로도 작동할 수 있어요. 그걸 그 안에 있을 때는 자각하지 못하다가 진료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됐죠.”
-국가폭력 피해자들로 시작해 찾는 현장의 범위가 점점 넓어진 건 선택이었나요.
“2011년 경기 평택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한테 무작정 갔어요. 열네 번째 죽음이 있고 나서요. 그 몇 개월 전 그 노동자의 아내도 죽었고, 이제는 남매인 자식들만 남았다는 기사를 보고 갔지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징후를 온몸으로 느꼈기에 그랬을 거다.
“트라우마 현장에서는 진료실에서 하듯 앉아서 ‘상담하세요. 오세요’ 하면 안돼요.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의 특성 때문이죠. 동료들이 잇따라 죽어가면 ‘다음은 내 차례인가’ 공포가 말할 수 없이 높아지거든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막막하고 무기력한 게 동료도 나도 같거든요. 하루하루가 그렇게 죽을 판인데 옆 사람이 죽으면 그 공포가 말할 수 없이 커지는 거죠. 그러니 동료들끼리도 안 봐요. 그런데 그 문제를 언급하며 정신과의사가 상담해줄 테니 오라고 한다고 가겠어요? 나는 괜찮다고 외면하죠. 세월호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내 자식이 아직 바다에 있는데, 내 자식이 그렇게 됐는데, 내 마음 편하자고 상담? 못 받아요. 자기를 그렇게 처벌하는 거예요. ‘내가 괜히 안산으로 직장을 옮겨서, 혹은 수학여행 가기 전에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도 보내서 그렇게 된 거야’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 내가 죽인 것 같죠. 사랑하는 순서대로 죄의식을 안는 거예요. 그렇게 죄의식이 통제할 수 없이 커지면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래서 트라우마 치유는 치유를 시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는 과정이 정말 전문적이어야 한다고 느껴요. 이 사람이 나를 믿고 얘기하기까지 가는 데 에너지의 8할이 들어가야 해요.”
◇트라우마 현장에서 정성 들여 집밥한 이유
그래서 그가 평택에서 처음 만든 건 토요일을 이용한 해고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놀이 프로그램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와 해고노동자들 사이에 대화의 다리가 생겼다. 커피 마시며 툭 툭 오간 말에 마음의 둑이 조금씩 허물어졌고, 첫날 오후부터 집단 상담이 시작됐다. 파업 이후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고 또 같은 마음을 확인하면서 방이 울음바다가 됐다. 이어 해고자 아내들을 위한 집단 상담까지 생겼다. 평택시청의 도움으로 빌린 사무실에서였다. 이후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의 심리치유센터 ‘와락’으로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 때는 진도 팽목항에 내려간 이후에 아예 안산으로 거처까지 옮겼죠.
“팽목항에 갔을 때 국가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었죠. 무간지옥이었어요. 참사가 나고 일주일이 안돼 팽목항으로 갔어요.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치유한 경험이 나만큼 많은 사람이 없으니 언젠가는 내가 그 분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다면 현장에 가서 이 사고의 본질을 알아야 했어요. 당시엔 아이들을 구조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죠. 부모들은 그때 정말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 했어요. 굉장히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아이들을 구하려면 이런 걸 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하고요.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었죠. 그때 뭐가 도움이 되겠어요. 잠수사들이 아이들을 끌어올리면 신원 확인을 하는 부모들 옆에서 울어주고 잡아주고 버텨주는 것 외에는요.”
-그것 역시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데요.
“트라우마죠. 세월호 참사의 본질이 뭔지 그때 온몸에 각인됐어요. 나보다 더 생명이 펄떡펄떡 해야 할 아이들이 멈춰있다는 것, 우주가 사라졌다는 게 참사의 본질이에요. 용납할 수 없죠. 그래서 그때 하고 있던 일을 다 정리하고 안산으로 갔어요.”
그는 이번엔 세월호 참사 가족을 위한 치유공간 ‘이웃’을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위한 ‘이웃’의 생일 모임은 영화가 되기도 했다.
“‘이웃’에서 생일 모임을 준비하면서 또 생일 모임을 하면서 그 아이와 관련한 얘기를 끊임없이 주고 받아요. 아이의 사진도 보고요. 그러다 보면 ‘저 아이가 왜 여기에 없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생일 모임을 계속해도 적응이 안 되더군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살아있는 것 같은데 없으니 그 간극에서 오는 고통과 분노, 죄의식, 비현실감이 상처의 본질이죠.”
-‘와락’에서도 ‘이웃’에서도 집밥을 치유의 매개로 삼았죠.
“처음에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만나보니 투쟁을 할 때, 서울로 올라가서 사측도 만나고, 연대하는 단체도 만나고, 국회도 찾아가고 하는데 다 길에서 밥을 먹더라고요. 돈이 없으니까요. 자기들끼리 규칙을 정해서 한 끼에 4,000원 미만으로 먹는 거예요. 그러니 식당에 들어가서도 얼마인지 메뉴판만 보고 도로 나오기도 하고요. 사무실에서도 중국산 김치에 밥을 먹었죠. 그렇게 밥을 먹고서 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어떻게 느끼겠어요. 그래서 ‘와락’을 하면서 여기 저기서 기부 물품을 받았는데 식기만은 새것을 사자고 했어요. 식판 말고 그릇으로요. 딸이 큰 병 앓고 오면 친정 엄마가 뭐라도 고아서 해내잖아요. 내상 입은 사람들을 보듬고 치유하는 공간이니 친정 엄마가 차려주듯 밥상만은 제일 좋은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서 내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이웃’의 치유밥상도 많이 알려졌다. ‘이웃’에선 아예 각상으로, 명인의 놋쇠 수저에 도예가가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기리며 구운 그릇에 밥을 차려냈다. 그의 책에 붙은 ‘집밥 같은 치유 레시피’는 그래서 생긴 말일 테다.
-‘당신이 옳다’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이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데요. 현장에서도 그런 걸 느꼈겠지요?
“트라우마 현장에선 사람을 구하는 사람이 여럿이죠. 자원활동가도 그렇고, 이웃이 사람을 구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전문가인 거예요.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가장 탁월한 치유자가 돼요. 치유의 근본 원리이기도 해요. (의사가 되는) 트레이닝의 근본도 나 자신의 치유거든요. 자격증이 있어야 전문가인 건 아니죠. 사람을 구해야 전문가지. 자격증이 오히려 칼이 될 수 있죠. ‘나는 알아. 너는 모르지’ 하는 자세는 폭력이니까요.”
◇결정적 순간에도 매니저가… 스타의 삶
-‘속마음산책’이란 걸 하고 있지요.
“(‘당신이 옳다’에 있는 심리적 CPR을) 실제 모여서 해보자는 취지예요. 공감자(들어주는 사람)와 화자(말하는 사람)로 나눠 신청을 받아요. 40쌍 정도가 100분간 서울숲길을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죠. 공감자는 ‘당신이 옳다’를 완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고요. 공감자는 화자를 만나기 전 미리 저와 만나서 한 시간 동안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걸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요. 그렇게 화자와 공감자가 속마음산책을 한 뒤에 집단상담처럼 모두 모여서 그 경험을 공유해요.”
-해보니 어떤가요?
“공감자가 화자보다 훨씬 어린 경우가 있었어요. 서로 제대로 공감이 될지 걱정하기도 하죠. 그런데 한 존재가 나를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고 물어보기 시작하면, 나이도, 성별도, 학벌도 상관없어져요. 존재와 존재로 만난다는 게 갖는 파급력이 그런 것이에요. 공감이 무엇이고 주목하고 집중하는 힘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알게 되는 시간이죠. 내가 일생에 이렇게 주목 받아본 적이 있나, 누가 내 얘기에 이렇게 집중해본 적 있나, 없었구나, 그래서 힘들었구나, 나 지쳤구나 이렇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분명하게 보이죠. 속마음산책에 전문가는 없어요. 우리 모두가 치유자라는 게 극명해지는 시간이에요.”
다른 이에게, 온몸을 다해 공감하는 한 사람이 되어주는 산책인 거다. 그 한 사람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가장 최근으로는 설리, 최진리씨였다.
-설리의 죽음을 보면서 그 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달라졌을까 생각했어요.
“스타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죠. 팬들의 관심과 욕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으니까요.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내쳐진다는 공포 역시 잘 알고 있을 테고요. 그런데 그런 스타의 죽음 때마다 대부분 매니저나 코디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눴다거나, 그들이 발견했다는 게 너무나 안쓰러워요. 결정적인 순간에도 그들 외에는 자신의 곁을 지켜주거나 생사를 살필 사람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건 물리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럴 거예요. 정서적으로 매우 취약한 삶의 구조인 거죠. 우리나라 정도의 정신건강 수위라면 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어떤지, 죽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같은 말을 밥 먹었는지 묻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으로 해야 해요. 죽고 싶은 마음인 사람이 죽음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돼요. 그러니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고 주목한다는 것의 힘이 어마어마하죠. 누군가 내 고통을 담담하고도 안정적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자기의 고통이 누군가와 연결돼있다는 것을 확인해요. 그 사람은 죽지 않죠.”
◇한 사람이 전부다
-예전 병원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던 시절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주관적 측면에서 보면 나는 훨씬 더 윤택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요. 이 길은 나의 적극적인 선택이죠. 내가 이로운 쪽으로, 내가 끌리는 쪽으로 선택해왔어요.”
그 선택은 자신 곁에 한 사람, 한 명이지만 전부인, 남편 이명수(심리기획자)씨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테다. 서로에게 온전한 소울메이트이자 도반(道伴ㆍ도로서 사귄 벗) 같은 두 사람을 보며 늘 비결이 궁금했다. ‘당신이 옳다’의 영감자인 이명수씨는 이 책을 일컬어 “내 아내의 모든 것”이라고 표현했다. “일년 363일(이틀 뺀 거 맞다) 24시간 함께 있다”는 두 사람은 그러고도 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이를 테면 “혜신아, 내 생에 목표는 너야. 그것 밖에 없어”같은 말이 일상이라니. 농담이라면 허할 테지만, 충만함에서 나온 말이니 이 관계의 비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관계의 비결이 있을까요?
“있어요. (미소) 뭐냐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한테 눈을 뗀 적이 한번도 없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그랬어요. 우리는 어떤 경우든 우리 둘이 최우선이에요. 우리가 아이들 키우려고 만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 현장에서 치유자로 존경 받으려고 산 것도 아니고, 일을 함께 해서 돈 벌려고 만난 것도 아니거든요. 사랑해서 만났고 사랑하는 둘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삶의 목적이에요. 우리가 자신이 우선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어요. 트라우마 현장에 가도 우리 둘의 관계를 뒷전으로 물린 적이 없죠.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훼손되면 세상을 구한대도 가지 않아요. 서로에게서 한번도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어요. 우리 둘의 관계가 이렇게 강력하지 못했다면 동력이 없어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그 일들을 못했을 거예요. 우리가 15년 간 트라우마 현장과 함께 해온 건 에너지가 남아서였죠.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자식과 관계에서도 에너지 소모가 없거든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없으니 심리적인 곳간이 그득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한 거죠.”
마지막 질문은 ‘치유자 정혜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는 무엇인가’하는 거였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질문을 들은 순간 떠오른 거였다고 했다. 곧 이해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는 ‘명수씨를 지킨다’는 게 딱 떠올랐어요. 그의 마음도 지키고, 그의 몸도 지키고요(이명수씨는 1년 5개월여 전 심정지로 쓰러진 적이 있다). 둘 다 나이가 들면서 무대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물러나는 시기죠. 명수씨는 나보다 네 살이 많으니 좀더 앞서서 그 시기에 돌입해가고 있고요. 그러니 내가 지금 명수씨를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이고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에요.”
-그것은 곧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한 것이겠지요.
“맞아요. 나를 지키려면 명수씨를 지켜야 하죠. 이제는 거의 둘이 하나인 것 같아요. 하하. 그것 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어요.”
그가 세상의 상처받은 이들에게 ‘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것도 자신의 한 사람에게서 받은 치유의 힘을 이미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터다. 나는 누구의 한 사람일까, 내 곁엔 또 그 한 사람이 있을까.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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