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EBS 프로그램 ‘그림을 그립시다’로 국내에 소개된 미국 화가 겸 방송인 밥 로스(Robert Norman “Bob” Ross, 1942.10.29~ 1995.7.4)는 똑같은 그림을 늘 세 편씩 그렸다. 그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PBS 프로그램 ‘The Joy of Painting’를 맡아 시즌당 13편씩 모두 31시즌을 진행했다. 그는 매회 25~30분 동안 그림을 한 점씩 즉흥적으로 그렸고, 구도와 표현의 ‘행복한 우연’을 특유의 행복한 표정으로 자랑했지만, 실은 그는 예행 연습으로 같은 그림을 녹화 전에 미리 그려보곤 했다. 그리고 녹화가 끝난 뒤 역시 같은 그림을 또 한 장 그렸다. 그건 ‘Bob Ross: The Happy Painter’ 등 그의 책에 실을 스틸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방송에 소개된 그의 그림 원화는 공식적으로 1209점(13x31x3)이고, 생애를 통틀어선 약 3만점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예술적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얻진 못했다. 그림 값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아마추어 그림 거래사이트에는 밥 로스의 비디오나 책을 보고 따라 그린 ‘밥 로스 스타일’의 그림들이 크기에 따라 수십~수백 달러에 거래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그는 방송 출연료 전액을 기부했다. 대신 책과 비디오, 미술용품을 팔았다. 그가 림프종 합병증으로 숨지던 무렵 ‘밥 로스 주식회사’는 자산가치 1,500만 달러로 평가됐다.
남부 플로리다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60년 18세에 미 공군에 입대해 1981년 상사로 제대했다. 복무 기간 중 10여년을 알래스카 아일슨(Eielson) 공군기지에서 지냈고, 거기서 생애 처음 눈을 보게 됐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황량한 눈 풍경이 거기서 비롯됐다. 실제로 그는 군 복무 기간 중 앵커리지 군인클럽 그림 교실에 다니며 그림을 익혔고, 그보다 앞서 TV 그림 쇼를 진행한 독일 화가 빌 알렉산더에게서 ‘Wet to Wet’ 기법, 즉 유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덧칠하는 기법을 배워, 자기 것으로 발전시켰다. 부업으로 그려 팔던 그림 수입이 군인 봉급보다 많아지자 그는 제대했다. 군대 고함소리에 질려 제대 후에는 절대 큰 소리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말도 있다. 방송에서 들려준 그의 잔잔한 목소리는 훗날 수면 클리닉의 음향 자료로도 쓰였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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