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사회 2,3세대 자녀들에게 ’너희들의 몸 속에는 코리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문화재라는 키워드, 그 이상의 가치를 찾기 어려웠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시 외곽 코리아타운에서 이수갤러리(Leesu Gallery)를 운영하고 있는 이창수(62•미국명 데이빗 리) 관장의 남다른 문화재 사랑 이야기다. 1984년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태평양을 건넌지 올해로 꼬박 36년째. 20대 후반 청년의 홍안은 어느덧 반백에 가려 빛을 잃었지만 눈빛만큼은 상대를 제압할 듯 형형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문화재와 전혀 관련 없는 업(業)으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그의 본업은 자동차 수리와 리모델링. 지난 18일 갤러리에 들어서자 미석 박수근, 이당 김은호, 운보 김기창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가들의 작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는 “망치를 두들기고, 기름냄새 맡아가며 한 점 한 점 사들인 작품”이라고 진한 애정을 표시했다. 이어 국내에 단 한번도 소개되지 않은 진기한 고미술 문화재 300여점이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관장은 14세기 말 작품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수렵도 2점을 전격 공개했다.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고려시대 수렵도는 2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역시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수렵도 1점이 그것이다. 익재 이제현의 작품인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가 있지만 수렵도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평가다. 이 관장이 이날 공개한 수렵도 2점은 비단에 채색으로 가로 48cm, 세로 40cm의 크기와 가로 50cm, 세로 40cm로 공민왕의 천산대렵도와 배경과 옷차림이 매우 흡사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에는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긴장감이 가득했고, 쫓고 쫓기는 역동성이 화면 전체를 감쌌다. 세계 3대 미술품 경매회사 소더비와 크리스티 옥션의 회원이기도 한 이 관장은 10여년전 미국인 컬렉터(수집가)한테서 2점을 한꺼번에 구매했다고 밝혔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회화는 불화가 중심이다. 전 세계에 고려불화가 160여 점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그나마 130여점이 일본에 있고, 미국과 유럽에 20여점, 정작 국내 소재 고려불화는 10여점에 그친다. 그런 점에서 이 관장이 공개한 고려 수렵도 2점은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은 “고려시대 수렵도 자체가 2점에 불과한데, 미국에서 새롭게 2점이 발견됐다는 것은 우리 미술사의 축복이 아니겠느냐”며 ”제작연대를 확인해야겠지만 육안으로만 보면 공민왕의 천산대렵도급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이 밖에도 상상의 동물 해태를 주제로 한 ‘해태 진사청화연적’도 공개했다. 연적은 자라와 두꺼비, 혹은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해태상 전신에 진사(辰砂•붉은색 안료)기법을 넣은 연적은 드물다. 수 년전 소더비 경매를 통해 구입했다는 그는 위작 논란에 대해서 “좌대위에 올라 앉은 실물을 보면 그런 말은 꺼낼 수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5㎝크기의 십장생도와 송강 정철의 현손(손자의 손자) 정호가 1726년(숭정갑신 후 82년)에 쓴 백자청화 묘지석 6점,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 1점 등 보물급 문화재가 그의 수장고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180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단원의 유작 중에 1811년에 그린 것으로 표기돼 있는 그림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전문가들은 진품으로 확인되면 단원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내려야 할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돈이 좀 모이기만 하면 경매시장에 쏟아 부어 가족들한테는 ‘나쁜 아빠’로 찍혔다는 그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절박함에 컬렉터로 나서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실제 이 관장은 LA 코리아타운에서 지명도 높은 문화 해설사로도 통한다. LA지역 라디오방송을 통해 그림 보는 법, 문화재 읽기 등의 주제로 수년간 교양 강의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 컬렉터들은 40년전부터 미 서부지역 일대 고미술품을 싹쓸이 한데 반해, 자신은 불과 20년전에 컬렉터의 길에 들어서 겨우 이름을 알리는 수준이라며 몸을 낮췄다.
로스앤젤레스=글•사진 최형철 선임기자 hc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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