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 단풍도 높다란 낭떠러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이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1937년 월간지 여성 10월호 ‘가을의 표정’ 난에 실린 백석의 수필 ‘단풍’이다. 짙은 빨간빛을 뽐내는 단풍잎에서 백석은 풍성한 재화와 영화, 한창 익어 불타오르는 사랑의 화려함과 강렬함을 봤다. 길이가 짧아 시로도 간주되는 이 산문은 시 못지 않게 백석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글 중 하나다. 백석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수필에서도 문학적 형식을 중시했고, 초창기 산문문학의 수준을 크게 드높인 작가 중 하나였다.
최근 출간된 ‘정본 백석 소설ㆍ수필’(문학동네)은 백석이 쓴 여러 산문 가운데 소설과 수필을 추려 정본과 원본을 확립하고, 작품별로 해설을 단 것이다. 백석 연구의 선구자인 고형진 고려대 교수가 10여 년에 걸친 자료 조사와 연구를 종합했다. ‘정본 백석 소설ㆍ수필’이 백석의 산문 미학을 엿볼 수 있게 한다면,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은 1995년 출간된 백석의 연인 김자야의 산문을 새롭게 펴낸 것이다. 젊은 날 백석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백석 정조의 이면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서브텍스트로 여겨진다.
백석을 비롯해, 이상과 김수영 등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사랑 받은 대표 시인들을 다시 읽고 재조명하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시인들의 생애를 복원하는 평전에서부터, 오늘날 작가들이 대표작을 새롭게 해석한 책까지, 종류와 방식도 다양하다.
‘세계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서해문집)는 김수영의 후예를 자처하는 8명의 작가와 평론가(서효인, 손미, 정용준, 박수연, 오창은, 김응교, 서영인, 김태선)들이 김수영의 삶과 문학의 공간을 찾아 걷고, 생각하고, 발견한 기록을 모은 것이다. 종로, 도쿄, 만주, 부산, 거제도까지, 김수영 생애의 주요 장면마다 그가 머물던 공간을 중심으로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반추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은 2020년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는 책들이 줄줄이 나왔다.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문학과지성사)는 이상의 대표작 ‘날개’를 여섯 명의 소설가(이승우, 강영숙, 김태용, 최제훈, 박솔뫼, 임현)가 새롭게 이어쓰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날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시작하거나, ‘날개’ 속 아내를 초점화하는 등 작가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날개’를 다시 읽고, 쓴다.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민음사)는 추상시를 써온 박상순 시인과 이상의 시 50편을 전면 한글화하고 해석화한 해석판 이상 시전집이다. 박 시인이 이상과 비슷한 이력(실험시 시인이자 화가)을 무기로 해석을 시도한다면, ‘이상 연구’(민음사)는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간의 오랜 이상 연구 작업을 총결산한 본격 이론서다. 특히 절판된 ‘이상 텍스트 연구’를 대폭 수정하고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보완해 비평적 전기의 면모를 보여준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